제 3 편 양생주(養生主)
1. (삶에는 끝이)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습니다. 아는 것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알려고만 한다면 더더욱 위험할 뿐입니다.
착하다는 일 하더라도 이름이 날 정도로 하지 말고, 나쁘다는 일 하더라도 벌받을 정도로는 하지 마십시오. 오직 중도를 따라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몸을 보전할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어버이를 공양할 수 있고, 주어진 나이를 다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2. (포정의 소 각뜨기(庖丁解牛))
포정(庖丁)이라는 훌륭한 요리사가 문혜군(文惠君)을 위하여 소를 잡았습니다.
손을 갖다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을 디디고, 무릎을 굽히고, 그 소리는 설컹설컹. 칼 쓰는 대로 설뚝설뚝. 완벽한 음률. 무곡(舞曲) 『뽕나무 숲(桑林)』에 맞춰 춤추는 것 같고, 악장(樂章) 『다스리는 우두머리(經首)』에 맞춰 율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문혜군이 말했습니다. “참, 훌륭하도다. 기술(術)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요리사가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귀히 여기는 것은 도(道)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통째인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신(神)으로 대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 기관은 쉬고, 신(神)이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에 칼을 댑니다. 이렇게 정말 본래의 모습에 따를 뿐, 아직 인대(靭帶)나 힘줄(腱)을 베어 본 일이 없습니다. 큰 뼈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습니까?
훌륭한 요리사는 해마다 칼을 바꿉니다.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요리사는 달마다 칼을 바꿉니다.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19년 동안 이 칼로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 칼날은 이제 막 숫돌에 갈려 나온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이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가니 텅 빈 것처럼 넓어, 칼이 마음대로 놀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19년이 지났는데도 칼날이 이제 막 숫돌에서 갈려 나온 것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근육과 뼈가 닿은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다루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 조심합니다. 시선은 하는 일에만 멈추고, 움직임은 느려집니다. 칼을 극히 미묘하게 놀리면 뼈와 살이 툭하고 갈라지는데 그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같습니다.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흐뭇한 마음으로 칼을 닦아 갈무리를 합니다.“
문혜군이 말했습니다. 훌륭하도다. 나는 오늘 포정의 말을 듣고 ‘생명을 북돋움(養生)’이 무엇인가 터득했노라.“
3. (외발 우사(右師))
공문헌(公文軒)은 우사(右師, 오른쪽 장군)를 보자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이게 어찌 된 사람이오? 어이하여 외발이 되었소? 그것이 하늘이 한 일이오, 사람이 한 일이오?”
[누군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한 일이지 사람이 한 일이 아니오. 하늘이 나를 낳을 때 외발이 되게 했소. 사람의 모양이란 본래 두 발을 갖추는 것. 이로 보아도 외발임은 하늘이 한 일이지 사람이 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소.”
4. (못가의 꿩)
못가의 꿩 한 마리. 열 걸음에 한 입 쪼고, 백 걸음에 물 한 모금. 갇혀서 얻어먹기 그토록 싫어함은, 왕 같은 대접에도 신이 나지 않기 때문.
5. (현해(懸解), 노자의 죽음)
노자(老子)가 죽었을 때 진실(秦失)이 문상하러 갔는데, 곡을 세 번만 하고는 나와 버렸습니다.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분의 친구분이 아니십니까?”
“친구지.”
“그런데 지금처럼 그런 식으로 문상하셔도 되는 것입니까?”
“되지. 처음엔 나도 여기 모인 사람들이 노자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으이. 아까 문상하러 들어가 보니, 늙은이들은 마치 자식을 잃은 것처럼 곡을 하고, 젊은이들은 마치 어머니를 잃은 것처럼 흐느끼고 있더군. 이처럼 모인 사람들이 떠들고 우는 것은 노자가 원하는 바가 아닐 걸세. 이렇게 하면 하늘을 피하는 것이요, 사물의 본성을 배반함이요, 받은 바를 잊어버리는 것일세. 옛날 사람들은 이를 일러 ‘하늘을 피하려는 데 대한 벌’이라고 했지. 어쩌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요, 어쩌다가 세상을 떠난 것도 순리이기 때문일세.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를 따른다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여들 틈이 없지. 옛날 사람들은 이를 일러 ‘하늘님의 매닮에서 풀려나는 것(懸解)’이라 했네.”
6. (장작과 불)
손가락은 장작을 지피는 일을 할 뿐, 불이 전해지면 그 불은 꺼짐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