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재물론(齋物論) - 사물을 고르게 하다
1.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남곽(성곽 남쪽)에 사는 자기(子綦)라는 사람이 책상에 기대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자기 몸과 마음을 다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 앞에서 모시고 서 있던 제자 안성자유(顔成子遊)가 물었습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 몸도 이렇게 마른 나무 같아질 수 있고, 마음도 죽은 재(灰) 같아질 수 있습니까? 지금 책상에 기대앉아 계신 분은 이전에 이 책상에 기대앉아 계시던 그 분이 아니십니다.”
자기(子綦)가 말했습니다. “언(偃)아, 참 잘 보았구나. 지금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네가 그 뜻을 알 수 있을까? 너는 사람들이 부는 퉁소 소리를 들어 보았겠지만,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겠지. 설령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어 보았을지 모르지만,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2. (하늘의 퉁소 소리)
자유(子遊)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감히 물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자기(子綦)가 대답했습니다. “땅 덩어리가 뿜어내는 숨결을 바람이라고 하지. 그것이 불지 않으면 별일 없이 고요하지만, 한번 불면 수많은 구멍에서 온갖 소리가 나지. 너도 그 윙윙 하는 소리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산의 숲이 심하게 움직이면, 큰 아름드리 나무의 구멍들, 더러는 코처럼, 더러는 입처럼, 더러는 귀처럼, 더러는 목이 긴 병처럼, 더러는 술잔처럼, 더러는 절구처럼, 더러는 깊은 웅덩이처럼, 더러는 좁은 웅덩이처럼 제각기 생긴대로, 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 화살이 씽씽 나는 소리, 나직이 꾸짖는 소리, 숨을 가늘게 들이키는 소리, 크게 부르짖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깊은 데서 나오는 듯한 소리, 새가 재잘거리는 소리 등 온갖 소리를 내지. 앞에서 가볍게 우우- 하는 소리를 내면, 뒤따라서 무겁게 우우- 하는 소리를 내고, 산들바람이 불면 가볍게 화답하고, 거센 바람이 불면 크게 화답하지. 그러다가 바람이 멎으면 그 모든 구멍은 다시 고요해진다. 너도 저 나무들이 휘청휘청 구부러지거나 살랑살랑 흔들리기도 하는 것을 보았겠지.”
자유(子遊)가 말했습니다. “땅이 부는 퉁소 소리란 결국 여러 구멍에서 나는 소리군요. 사람이 부는 퉁소 소리는 대나무 퉁소에서 나는 소리인데,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란 무엇입니까?”
자기(子綦)가 대답했습니다. “온갖 것에 바람을 모두 다르게 불어넣으니 제 특유한 소리를 내는 것이지. 모두 제 소리를 내고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 소리가 나게 하는 건 누구겠느냐?”
3. (지적 활동 감정의 작용)
큰 꾀는 느긋하고, 작은 꾀는 좀스럽고,
큰 말은 담박하고, 작은 말은 시끄럽고,
잠잘 때는 꿈으로 뒤숭숭하고, 깨어 있을 때는 감각 기관이 일을 시작하고,
접촉하는 일마다 말썽을 일으키고, 마음은 날마다 싸움질에나 쓰고,
더러는 우물쭈물, 더러는 음흉, 더러는 좀생이
작은 두려움에는 기죽어하고, 큰 두려움에는 기절하고,
시비를 가릴 때는 물매나 화살이 날아가듯 날쌔다. 끝내 이기겠다는 것을 보면, 하늘에 두고 한 맹세 지키듯 끈덕지다. 날로 쇠하는 것 보면, 가을·겨울에 풀과 나무가 말라 가는 것과 같고 하는 일에 빠져들면 헤어날 길이 없다. 늙어서 욕심이 지나친 것 보면, 근심에 눌려 꼭 막힌 것 같다. 죽음에 가까워진 그 마음은 다시 소생시킬 수가 없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염려와 후회, 변덕과 고집, 아첨과 방자, 터놓음과 꾸밈. 이것들이 모두 빈 데서 나오는 노래요, 습한 데서 나오는 버섯이다. 우리 안에 밤낮으로 번갈아 나타나지만,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지.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여러 가지 마음의 변화가] 나타나기에 우리가 삶을 유지하는 것. 이런 것들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으면 이런 것들이 나타날 턱이 없지. 이야말로 진실에 가까운 것이나 이런 변화가 나타나게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구나.
4. (참주인(眞宰))
[이런 변화를 주관하는] 참주인(眞宰)이 분명히 있는데, 그 흔적을 잡을 수 없구나. 참주인이 작용하는 것은 믿을 만한데,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셈이지. 실체가 있지만 모양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몸에는 뼈마디가 백, 구멍이 아홉, 여섯 가지 내장이 있는데, 그 중에서 어떤 것을 특별히 더 좋아해야 하는 걸까? 자네는 모든 것을 다 좋아하나? 그 중에서 어느 것을 특히 더 좋아하는 것 아닌가? 그러면 [그 좋아하는 것만 떠받들고] 다른 것은 모두 머슴이나 종처럼 취급하나? 머슴이나 종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다스릴 수 없는 것인가? 서로 임금과 신하의 입장을 번갈아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 속에 참임금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그 실체를 알든 모르든 그 참모습에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일단 온전한 몸을 받았으면, 우리는 그것을 일부러 망치지 말고, 저절로 쇠잔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사물을 대하여 서로 깎고 가는 동안에 우리의 삶은 달리는 말처럼 걷잡을 수 없이 지나가고 마니, 이 또한 슬픈 일이 아니냐? 죽을 때가지 일하고 수고해도 아무것도 잘된 것 보지 못하고, 그저 일에 쫓기고 지쳐 돌아가 쉴 데도 없으니, 이 어찌 애처롭지 않으냐? 그래도 죽지는 않았다고 자위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살아 있다는 것] 뭐 그리 대수냐? 어차피 몸도 쇠하고 마음도 그렇게 되고 마니 정말 애처롭기 그지없는 일 아니겠느냐?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본래 이처럼 엉망진창인 것인가? 오직 나만 이런 것인가? 사람들 중에 이렇게 엉망진창이 아닌 이들도 있다는 것일까?
5. (굳은 마음(成心))
우리에게 생긴 ‘굳은 마음(成心)’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떠받들면, 스승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렇게 되면 어찌 변화의 이치를 아는 현명한 사람들만 이겠느냐, 우둔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지. 아직 이런 굳은 마음이 없는데도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것은 마치 오늘 월(越)나라를 향해 떠나 어제 그곳에 도착했다는 것과 같이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수 있다고 하면 우(禹) 임금처럼 신령한 분이라도 알 수 없을 텐데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이를 알 수 있겠느냐?
6. (말을 한다는 것은)
말을 한다는 것은 그저 숨을 내쉬는 것만이 아니다. 말에는 뜻이 있지. 말을 했지만 말하려는 바가 뚜렷하지 않다면, 말을 했다고 해야 할까, 아직 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말은 새끼 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와 다르다고 하는데 정말 다른 것일까, 다르지 않은 것일까?
도(道)가 무엇에 가리어 참과 거짓의 분별이 생긴 것일까? 참말은 무엇에 가리어 옳고 그름의 차이가 생긴 것일까? 도가 어디로 사라지고 없어진 걸까? 참말이 어디에 있기에 제구실을 못하는가? 도는 자질구레한 이룸에 가리고, 참말은 현란한 말장난에 가리었다. 그리하여 유가(儒家)와 묵가(墨家)가 시비를 다투어, 한 쪽에서 옳다 하면 다른 쪽에서 그르다 하고, 한쪽에서 그르다 하면 다른 쪽에서 옳다하는 것이다. 이들이 그르다 하는 것을 옳다 하고, 이들이 옳다 하는 것을 그르다 하려면, 무엇보다도 [이들의 옳고 그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밝음(明)이 있어야 한다.
7. (이것과 저것)
사물은 모두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모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자기를 상대방이 보면 ‘저것’이 되는 줄을 모르고, 자기가 자기에 대한 것만 알 뿐이다. 그러기에 이르기를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 때문에 생긴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것’과 ‘저것’이 서로를 생겨나게 한다는 ‘방생(方生)’이라는 것이지.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됨이 있기에 안 됨이 있고, 안 됨이 있기에 됨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일방적 방법에 의지하지 않고, [전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照之於天).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를 그렇다 함(因是)’ 이다.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동시에 ‘저것’이고, ‘저것’은 동시에 ‘이것’이다. 성인의 ‘저것’에는 옳고 그름이 동시에 있고, ‘이것’에도 옳고 그름이 동시에 있다. 그러면 ‘저것’과 ‘이것’은 따로 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저것’과 ‘이것’이 상대적 대립 관계를 넘어서서 없어지는 경지를 일컬어 ‘도의 지도리’라 한다. 지도리이기에 회전의 중심에서 무한한 변화에 대응한다. 옳음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요, 그름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 그러므로 ‘무엇보다 [옳고 그름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밝음(明)이 있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9 (뜻(指)과 말(馬))
뜻(指)을 가지고 그 뜻이 (본래) 뜻 아님을 밝히는 것은 뜻 아닌 것을 가지고 뜻 아님을 밝히는 것보다 못하다. 말(馬)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은 말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보다 못하다. 하늘과 땅도 하나의 뜻. 만물도 하나의 말.
되는 것을 일러 됨이라 하고 되지 않는 것을 일러 되지 않음이라 한다. 길은 다녀서 생기고 사물도 그렇게 불러서 그렇게 된다. 어찌해서 그렇게 되는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찌해서 그렇지 않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고 하니까 그렇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물에는 본래 그럴 까닭이 있고, 그럴 가능성도 있지. 그렇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고, 그럴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와 같은 이유로 작은 풀줄기든 큰 기둥이든, 추한 사람이든 서시(西施)든, 사물은 아무리 엉뚱하고 이상 야릇한 것이라도, 도의 견지에서 보면 모두 통하여 하나가 된다. 나누어짐이 있으면 이루어짐도 있고, 이루어짐이 있으면 허물어짐도 있다. 모든 사물에는 본래 이루어짐과 허물어짐이 따로 없이 모두 통하는 하나이다. 오로지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모두 통하는 하나를 깨닫고,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차별의] 범주 대신, [양쪽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것(庸)’에 머무를 수 있다.
보편적인 것이란 쓸모 있음을 말한다. 쓸모 있음이란 통함이고 통함이란 즐김이다. 즐김은 도에 가까움이다. 있는 그대로를 그렇다 하는 것(因是)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줄 모르는 것. 그것을 도(道)라 한다.
10. (조삼모사(朝三暮四))
사물이 본래 하나임을 알지 못하고 죽도록 한쪽에만 집착하는 것을 일러 ‘아침에 셋’이라 한다. ‘아침에 셋’이 무슨 뜻인가? 원숭이 치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명목이나 실질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성을 내다가 기뻐했다.
있는 그대로 인정(因是)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옳고 그름의 양극을 조화시킨다. 그리고 모든 것을 고르게 하는 ‘하늘의 고름(天鈞)’에 머문다. 이를 일러 ‘두 길을 걸음(兩行)’이라고 한다.
11. (세 가지 지극한 경지)
옛 사람들 중에는 지혜가 지극한 경지에 이른 이들이 있었다. 얼마나 깊은 경지에 이르렀을까? 아직 사물이 생겨나기 전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은 지극하고 완전한 경지로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 그 다음은 사물이 생겨나긴 했으나 거기에 아직 경계가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 다음은 사물에 구별은 있으나 아직 옳고 그름이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면 도(道)가 허물어진다. 도가 허물어지면 욕망(愛)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루고 허물어지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일까? 이룸과 허물어짐이라는 것이 따로 없는 것 아닐까?
이룸과 허물어짐이 있다는 것은 소문(昭文)이 거문고를 타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룸과 허물어짐이 없다는 것은 소문이 거문고를 타지 않음에 해당하는 것이다. 소문이 거문고를 타는 솜씨, 사광(師曠)이 북채를 들고 장단 맞추는 솜씨, 혜자(惠子)가 책상에 기대어 변론하는 솜씨는 모두 완벽에 가까워 그 이름이 후세에 남았다. 세 사람은 좋아하는 일에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없을 만큼 특출해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일로 남을 깨우치려 했다. 그러나 남을 깨우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남을 깨우치려 했기 때문에 (혜자 같은 사람은) ‘단단한 것, 흰건(堅白論)’ 같은 아리송한 변론으로 끝장나고 말았다.
소문의 아들은 아버지의 거문고 타기를 이어받았지만 일생 동안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이런 것을 이룸이라 한다면 나도 이룬 것이 있다 하겠고, 이런 것이 이룸이 아니라면 나나 다른 아무도 이룸이 없다 해야 할 것이다.
성인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현란한 빛을 없애려 한다. 그러기에 이것이냐 저것이냐 구별하려 하지 않고 ‘보편적인 것(庸)’에 머문다. 이것이 바로 [대립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밝음(明)‘이다.
12. (‘있음’과 ‘없음’)
이제 말 한마디 해보자. 이 말이 ‘이것’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같든지 다르든지 그것들과 한가지임이 분명하므로, 사실 그것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도 한번 말해 보자.
‘시작’이 있으면 아직 ‘시작하기 이전’이 있게 마련이다. 또 ‘아직 시작하기 이전의 이전’이 있게 마련이다. ‘있음(有)’이 있으면 ‘없음(無)’이 있게 마련이다. 또 ‘있음 이전의 그 없음’이 아직 있기 이전, 그것이 아직 있기 이전의 없음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데 갑자기 있음과 없음의 구별이 생긴다. 있음과 없음 중에 어느 쪽이 정말로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제 내가 뭔가 말했지만 이렇게 말한 것이 정말로 뭔가 말한 것인지 말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13. (털끝과 태산)
세상에 가을철 짐승 털끝보다 더 큰 것은 없으니 태산도 그지없이 작은 것이다. 갓나서 죽은 아기보다 오래 산 사람은 없으니 팽조도 일찍 요절한 사람. 하늘과 땅이 나와 함께 살아가고, 모든 것이 나와 하나가 되었구나.
모든 것이 원래 하나인데 달리 무엇을 더 말하겠는냐?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은 하나라고 했으니, [내가 한 말의 대상이 생긴 셈이라] 어찌 아무것도 없어서 말을 할 수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나라는 것과 내가 방금 말한 ‘하나’가 합하여 둘이 되었고, 이 둘과 본래의 하나가 합하여 셋이 된다. 이처럼 계속 뻗어 가면 아무리 셈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그 끝을 따라잡을 수가 없을 것이니 보통 사람들이야 일러 무엇하겠나?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도 이처럼 금방 셋이 되는데, 하물며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갈 때야 일러 무엇하겠나? 그러니 부산하게 좇아 다니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그러하다(因是)고 받아들이자.
14. (도(道)에는 경계도 이름도 없다)
사실 도(道)에는 경계가 없고 말(言)에는 실재가 없다. 말 때문에 분별이 생겨나는데 이 분별에 대해 말해 보기로 하자. 왼쪽(左)과 오른쪽(右), 논의(倫)와 논증(義), 분석(分)과 변론(辯), 앞다툼(競)과 맞겨룸(爭) 등이 있는데 이를 일러 여덟 가지 속성이라 하지. 성인들은 우주 밖에 있는 [초월적인] 것에 대해 존재 정도는 이야기하지만, 논의하려 하지는 않는다. 성인들은 세상 안에 있는 [내재적인] 것에 대해서도 논의하기는 하지만 논증하려 하지는 않는다. 또 역사적인 기록과 선왕들의 역대기에 대해 논증하기는 하지만 변론하려 하지 않는다. 분석하려 해도 분석할 수 없는 것이 있고, 변론하려 해도 변론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 있다. 왜 그럴까? 성인들은 [도를] 마음 속에 간직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서로 보이려고 변론을 한다. 그러므로 변론은 [도를] 보지 못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무릇 위대한 도는 이름이 없다. 위대한 변론은 말이 없다. 위대한 인(仁)은 편애하지 않으며 위대한 겸손은 [밖으로 드러내는] 겸양이 아니다. 위대한 용기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도(道)가 훤히 들여다보이면 도가 아니고 말도 변론만을 위한 것이라면 부족하다. 인(仁)이 융통성 없이 굳으면 두루 퍼질 수 없다. 겸손도 드러나게 하면 믿기지 못하며 용기가 사람을 해치는 것이라면 될 성부른 것이 못 된다. 이 다섯 가지는 본래 둥근 것이지만 잘못하면 모가 난다. 그러므로 알지 못함을 알고 멈출 줄 아는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다. 누가 말로 하지 않는 변론과 도라고 말할 수 없는 도를 알 수 있을까? 만약 이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하늘의 보고(寶庫)라 하리라. 이 보고는 부어도 차지 않고 퍼낸다고 비는 일도 없다. 그러나 왜 그런지는 모른다. 이런 경지를 일러 ‘은근한 빛’이라 한다.
15. (요 임금과 세 나라)
옛날에 요 임금이 순 임금을 보고 말했다. ‘내가 종(宗), 회(膾), 서오(胥敖) 세 나라를 치려 하오. 내가 왕위에 오른 후 [이 나라들이] 마음에 걸려 꺼림칙하니 웬일이오.’
순 임금이 대답했다. ‘이 세 나라의 왕들은 아직도 잡풀이 우거진 미개지에 살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꺼림칙해 하십니까? 전에 해 열 개가 한꺼번에 나와서 온 세상을 비춘 적이 있습니다만 임금님의 덕을 비춘다면 어찌 해 같은 데 비길 수 있겠습니까?“
16. (앎과 모름)
설결(齧缺, 이 없는 사람)이 스승 왕예(王倪, 왕의 후예)에게 물었다. ‘스승께서는 누구나 그렇다고 동의할 수 있는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스승께서는, 스승께서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아십니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그러면, 사물이란 알 수는 없는 것입니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 말이나 좀 해보세. 도대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장담]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아는 것이 아니라고 [장담] 할 수 있겠는가?
17. (사람과 미꾸라지)
자네에게 묻겠네.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고 반실불수가 되겠지. 미꾸라지도 그럴까? 사람이 나무 위에서 산다면 겁이 나서 떨 수밖에 없을 것일세. 원숭이도 그럴까? 이 셋 중에서 어느 쪽이 거처(居處)에 대해 바르게 안 것일까?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좋다고 먹지,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맛을 바르게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원숭이는 비슷한 원숭이와 짝을 맺고, 순록은 사슴과 사귀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놀지 않는가. 남자들은 모두 모장(毛嬙)이나 여희(麗姬)가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보자마자 물 속 깊이 들어가 숨고, 새는 보자마자 높이 날아가 버리고, 사슴은 보자마자 급히 도망가 버린다.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아름다움을 바르게 안다고 하겠는가?
내가 보기에, 인의(仁義)의 시작이나 시비(是非)의 길 따위의 것은 [결국 이처럼 주관적 판단 기준에 따라 걷잡을 수 없이] 번잡하고 혼란한데 내 어찌 이런 것이나 따지고 앉아 있겠는가?‘
18. (삶과 죽음에 무관)
설결이 말했다. ‘스승께서는 이로움과 해로움에 무관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인(至人)은 이로움이니 해로움이니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습니까?’
왕예가 대답했다. ‘지인(至人)은 신령스럽다. 큰 늪지가 타올라도 뜨거운 줄을 모르고, 황하와 한수가 얼어붙어도 추운 줄을 모르고, 사나운 벼락이 산을 쪼개고 바람이 불어 바다를 뒤흔들어도 놀라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구름을 타고 해와 달에 올라 사해(四海) 밖을 노닐지. 그에게는 삶과 죽음마저 상관이 없는데, 하물며 이로움이니 해로움이니 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19. (성인(聖人)의 경지)
구작자(瞿鵲子, 겁 많은 까치 선생)이 장오자(長梧子, 키다리 오동나무 선생)에게 물었다. ‘내가 큰 스승 [공자님]께 들었네만, 성인은 세상일에 종사하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거나 손해를 피하지 않고, 사람들이 희구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도(道)를 일부러 따르려 하지 않고, 말없이 말을 하고, 말을 하면서 말하지 않고, 띠끌 세상 밖에서 노닌다는군. 내 큰 스승께서는 이것을 맹랑한 소리라고 하시지만 나는 이것이 신비스런 도를 따르는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장오자가 대답했다. “이런 일은 황제(黃帝)가 들어도 어리둥절할 문제니, 어찌 공자 같은 사람이 알겠는가? 자네도 이런 일에 대해 너무 성급하게 어림짐작을 하는 것 같군. 달걀을 보고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을 들으려 하고, 화살을 보고 비둘기 구이를 생각하는 일과 같으이. 내가 자네에게 몇 마디 황당한 소리를 할 터이니 자네도 그저 황당한 듯 가볍게 들어 주게.
해와 달과 어깨동무, 우주를 끼어 차고, 모두와 하나 된다.
모든 것 혼잡한 대로 그냥 두고, 낮은 자리 높은 자리 무관하다.
사람들 빠릇 빠릇, 성인은 어리숙. 만년 세월 온갖 일.
오로지 완벽의 순박함 그대로. 모든 것들이 모두 그러함 그대로.
그리하여 서로가 감싸 안는다.
20. (여희(麗姬)의 후회)
삶을 즐거워하는 것이 미혹 아닐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어려서 집을 잃고 돌아갈 줄 모름과 같은 것 아닐까? 미녀 여희(麗姬)는 애(艾)라는 곳 변경지기 딸이었네. 진(晋)나라로 데려갈 때 여희는 너무 울어서 옷깃이 흠뻑 젖었지. 그러나 왕의 처소에 이르러 왕과 아름다운 잠자리를 같이하고 맛있는 고기를 먹게 되자, 울던 일을 후회하였다네. 죽은 사람들도 전에 자기들이 삶에 집착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까?
21. (공자도 자네도 꿈을 꾸고)
꿈에 술을 마시며 즐거워했던 사람이 아침에는 섭섭해서 운다. 꿈에 울며 슬퍼한 사람은 아침이 되면 즐거운 마음으로 사냥하러 나간다.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르지. 심지어 꿈속에서 해몽도 하니까. 깨어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지. 드디어 크게 깨어나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한 바탕의 큰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항상 깨어 있는 줄 알고, 주제넘게도 그러함을 분명히 아는 체하지. 임금은 뭐고 마소 치는 사람은 뭔가? 정말 꽉 막혀도 한참일세. 공자도 자네도 다 꿈을 꾸고 있으며 내가 공자나 자네가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역시 꿈일세. 이런 말이 괴상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들릴 테지만 만세(萬世) 후에라도 이 뜻을 아는 큰 성인을 만난다면, 그 긴 시간도 아침저녁 하루 해에 불과한 것처럼 짧게 여겨질 것일세.
22. (논쟁이 되지 않음은)
나와 자네가 논쟁을 한다고 하세. 자네가 나를 이기고 내가 자네를 이기지 못했다면, 자네는 정말 옳고 나는 정말 그른 것인가? 내가 자네를 이기고 자네가 나를 이지지 못했다면, 나는 정말 옳고 자네는 정말 그른 것인가? 한쪽이 옳으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그른 것인가? 두 쪽이 다 옳거나 두 쪽이 다 그른 경우는 없을까? 자네도 나도 알 수가 없으니 딴 사람들은 더욱 깜깜할 뿐이지. 누구에게 부탁해서 이를 판단하면 좋을까?
자네같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판단해 보라고 하면, 이미 자네 생각과 같으니, 그가 어찌 이를 옳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에게 바로 판단하게 한다면, 내 생각과 같으니, 그가 어찌 이를 판단할 수가 있겠는가? 자네와 다르고 나와도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판단하게 한들 자네나 내 생각과 다르니, 그가 어찌 이를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자네와 같고 나와도 같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판단하게 해도 이미 자네나 내 생각과 같으니, 그가 어찌 이를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나나 자네, 다른 사람이 모두 다 알지 못할 노릇인데 누구를 더 기다려야 하겠는가?
이처럼 변하기 쉬운 [시비 대립의] 소리에 기대하는 것은 아예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네. 이런 것을 ‘하늘의 고름(天倪)’으로 조화시키고 ‘무한의 변화(曼洐)’에 내맡기는 것이 천수(天壽)를 다하는 길이지. ‘하늘의 고름’으로 조화시킨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사람들은 보통 ‘옳다, 옳지 않다,’ ‘그렇다, 그렇지 않다’고 하네. 그러나 옳다고 하는 것이 정말로 옳다면, 옳은 것이 옳지 않은 것과 다르다는 것은 변론할 여지가 없는 일이지. 그렇다고 하는 것이 정말로 그렇다면, 그런 것이 그렇지 않은 것과 다르다는 것 또한 논쟁할 여지가 없는 일 아닌가. 햇수가 더해 세월 가는 것을 잊고 [옳다 그르다] 의미를 따지는 일을 잊어버리게. 구경(究竟)의 경지로 나아가 거기에 머물도록 하게.“
23. (엷은 그림자와 본 그림자)
망량(罔兩, 엷은 곁 그림자)이 영(景, 본 그림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조금 전에는 걸어가더니 지금은 멈추었고, 조금 전에는 앉았더니 지금은 일어섰으니, 왜 그렇게 줏대가 없소?’
그림자가 대답했다. ‘내가 딴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소? 내가 의존하는 그것 또한 딴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소? 나는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에 의존하는 것 아니겠소? 왜 그런지를 내 어찌 알 수 있겠소? 왜 안 그런지 내 어찌 알 수 있겠소?’
24. (물화(物化): 나비의 꿈)
어느 날 장주(莊周)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사물의 변화(物化)’라 한다.“
2012.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