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편 대종사(大宗師)
1. (하늘이 하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
하늘이 하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하늘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하늘과 함께 살아가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그의 ‘앎이 아는 것’으로 그의 ‘앎이 알지 못하는 것’을 보완합니다. 이리하여 하늘이 내린 수명을 다하여 중도에서 죽는 일이 없는 것. 이것이 앎의 완성입니다.
2. (올바른 앎의 근거)
그러나 여기에 어려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앎은 무엇에 근거해야만 비로소 올바른 앎이 됩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내가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인위적인 것이고, 내가 인위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자연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3. (진인(眞人)의 참된 앎)
그러므로 진인(眞人,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있어야 참된 앎이 있습니다. 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옛날의 진인은 모자란다고 억지 부리지 않고, 이루어도 우쭐거리지 않고, 무엇을 하려고 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실수를 해도 후회하지 않고, 일이 잘 되어도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도 무서워하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어 들어가도 뜨거워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사람의 앎이 높이 올라 도(道)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진인(眞人)은 꿈꾸지 않고)
옛날의 진인(眞人)은 잠자도 꿈꾸지 않고, 깨어나도 걱정이 없었습니다. 음식을 먹어도 맛있는 것을 찾지 않았고, 숨을 쉬어도 아주 깊이 쉬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목구멍으로 숨을 쉬지만, 진인은 발꿈치로 숨을 쉬었습니다. 외적 조건에 굴복한 사람은 그 목에서 나오는 말이 토하는 소리 같습니다. 여러 욕망에 깊이 탐닉한 사람은 하늘의 비밀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5. (하늘이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고)
옛날의 진인(眞人)은 삶을 즐겁다 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다 할 줄도 몰랐습니다. 태어남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았습니다. 의연히 갔다가 의연히 돌아올 뿐입니다. 그 시원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 끝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삶을 그대로 받아들여 살다가, 잊어버린 채로 되돌아갔습니다. 이를 일러 마음으로 도를 해치는 일이 없고, 사람의 일로 하늘이 하는 일에 간섭하려 하지 않음이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진인(眞人)입니다.
6. (기쁨과 노여움이)
이런 사람은 마음이 비고, 모습이 잔잔하고, 이마가 넓었습니다. 그 시원하기가 가을 같고, 훈훈하기가 봄 같았습니다. 기쁨과 노여움이 계절의 흐름같이 자연스럽고, 모든 사물과 어울리므로 그 끝을 알 수 없었습니다.
7. (스스로 즐거움을 맛보지 못한 사람)
그러므로 성인은 군대를 움직여 적국을 망하게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잃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로움과 혜택을 만대에 두루 베풀지만, 사람을 특별히 편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물에 통달하려는 사람은 성인이 아닙니다. 편애하는 사람은 인자(仁者)가 아닙니다. 하늘을 시간으로 구분하는 사람은 현자(賢者)가 아닙니다. 이해(利害)에 걸림이 있는 사람은 군자(君子)가 아닙니다. 이름을 위해 참된 자기를 잃어버리는 사람은 선비(士)가 아닙니다. 참된 자기를 잃고 참됨이 없는 사람은 딴 사람을 부리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고불해(泒不偕), 무광(務光), 백이(伯夷), 숙제(叔齊), 기자(箕子), 서여(胥餘), 기타(紀他), 신도적(申徒狄)처럼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고,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을 뿐, 스스로 즐거움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8. (옛날 진인(眞人)은)
옛날 진인(眞人)은 그 모습 우뚝하나 무너지는 일이 없고, 뭔가 모자란 듯하나 받는 일이 없고, 한가로이 홀로 서 있으나 고집스럽지 않고, 넓게 비어 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엷은 웃음 기쁜 듯하고, 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뿐, 빛나느니 그 얼굴빛, 한가로이 덕에 머물고, 넓으니 큰 듯하고 초연하였으니 얽매임이 없고, 깊으니 입 다물기 좋아하는 것 같고, 멍하니 할말을 잊은 듯했습니다.
9. (특별히 노력해서)
[옛날의 진인은] 형(刑)을 다스림의 몸(體)으로 삼고, 예(禮)를 날개로 삼으며, 지(知)를 때맞춤으로 생각하고, 덕(德)을 순리로 여겼습니다. 형을 다스림의 몸으로 삼았다는 것은 죽이는 일에 여유스러웠다는 것이요, 예를 날개로 삼았다는 것은 예를 세상에 널리 퍼지게 했다는 것이요, 지를 때맞춤으로 여겼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만 했다는 것이요, 덕을 순리로 여겼다는 것은 발 있는 사람이면 다 오를 수 있는 언덕에 올랐다는 뜻입니다만, 사람들은 진인이 특별히 열심히 노력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합니다.
10. (진인(眞人)의 경지)
그러므로 좋아하는 것과도 하나요, 좋아하지 않는 것과도 하나였습니다. 하나인 것과도 하나요, 하나 아닌 것과도 하나였습니다. 하나인 것은 하늘의 무리요, 하나가 아닌 것은 사람의 무리입니다. 하늘의 것과 사람의 것이 서로 이기려 하지 않는 경지, 이것이 바로 진인(眞人)의 경지입니다.
11. (모든 사물의 참모습)
죽고 사는 것은 운명입니다. 밤낮이 변함없이 이어지는 것과 같은 하늘의 이치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 모든 사물의 참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하늘마저 아버지처럼 여기고 몸 바쳐 사랑하는데, 하물며 하늘보다 더욱 뛰어난 것을 위해 그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임금마저 자기들보다 낫다 여겨 목숨을 바치는데, 하물며 임금보다 더욱 참된 것을 위해 그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2. (도(道)에서 변화되며 사는 것)
샘이 말라 물고기가 모두 땅 위에 드러났습니다. 서로 물기를 뿜어 주고, 서로 거품을 내어 적셔 주지만, 강이나 호수에서 서로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요(堯) 임금을 칭송하고 걸(傑) 왕을 비난하지만, 둘을 다 잊고 도(道)에서 변화되며 사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13. (삶을 주어 힘쓰게 하고)
대지(大地)는 나에게 몸을 주어 싣게 하고, 삶을 주어 힘쓰게 하고,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삶을 좋다고 여기면 내 죽음도 좋다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14. (천하를 천하에 감추면)
배를 골짜기에 감추고, 그물을 늪에 숨겨 두고서 이를 안전하다 합니다. 그러나 한밤중에 힘센 사람이 와서 들고 가 버립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합니다. 작은 것을 큰 것 속에 감추면 그만인 줄 알지만, 거기에는 아직도 새어 나갈 자리가 있습니다. 천하를 천하에 감추면 새어나갈 자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변함없는 사물의 참된 모습입니다.
15. (언제나 머물러 있는 경지에서)
우리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온 것만 가지고도 기뻐합니다. 사람의 모양이 한없이 바뀔 수 있다면 그 기쁨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인은 사물들이 새어 나갈 수 없어서 언제나 머물러 있는 경지에서 자유롭게 노닙니다. 일찍 죽어도 좋고, 늙어 죽어도 좋고, 내어나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본받으려 하는데, 하물며 모든 것의 뿌리요, 모든 변화의 근원을 본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6. (전할 수는 있으나)
무릇 도(道)가 실재라고 하는 믿을 만한 증거는 있지만, 그것은 함도 없고(無爲) 형체도 업습니다(無形). 전할 수는 있으나 받을 수가 없습니다(可傳而不可受; 敎外別傳, 以心傳心). 터득할 수는 있으나 볼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를 근본으로 하고 스스로를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있기 이전부터 본래 있었습니다. 귀신과 하늘님을 신령하게 하고, 하늘과 땅을 내었습니다. 태극보다 높으나 높다하지 않고, 육극(六極)보다 낮으나 깊다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과 땅보다 먼저 있었으나 오래되었다 하지 않고, 옛날보다 더 오래되었지만 늙었다 하지 않습니다.
17. (도를 터득한 사람들)
희위씨(狶韋氏)는 도를 터득하여 하늘과 땅을 들고 다녔고, 복희씨(伏戱氏)는 도를 터득하여 기(氣)의 근원으로 들어갔고, 북두칠성은 도를 터득하여 예로부터 틀림이 없이 돌고, 해와 달은 도를 터득하여 예로부터 쉼이 없고, 감배(堪杯)는 도를 터득하여 곤륜산(崑崙山)에 들어가고, 풍이(馮夷)는 도를 터득하여 황하(黃河)에서 노닐고, 견오(肩吾)는 도를 터득하여 태산(泰山)에 살고, 황제(黃帝)는 도를 터득하여 하늘에 오르고, 전욱(顓頊)은 도를 터득하여 현궁(玄宮)에 살고, 우강(禺强)은 도를 터득하여 북극에 서고, 서왕모(西王母)는 도를 터득하여 소광산(少廣山)에 자리 잡았는데 그 처음과 끝을 알 수 없고, 팽조(彭祖)는 도를 터득하여 위로 순(舜) 임금 때로부터 아래로 오패(五覇) 때가지 살고, 부열(傅說)은 도를 터득하여 무정(武丁)의 재상이 되어 세상을 뒤덮고, [죽어서는] 동유(東維)를 타고 기미(箕尾)에 올라 여러 별들 중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8. (성인의 도와 재질)
남백자규(南伯子葵)가 여우(女偊, 등 굽은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나이가 많은데, 아직도 얼굴은 갓난 아기와 같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도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도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어찌 될 성이나 싶은 일입니까? 당신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복량의(卜粱倚)라는 사람은 성인의 재질이 있으나 성인의 도가 없었고, 나는 성인의 도는 있으나 성인의 재질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그가 과연 성인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19. (삶을 잊게 되자 아침의 밝음을)
아무튼, 성인의 도란 성인의 재질이 있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이 더욱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신중하게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사흘이 지나자 그는 세상을 잊었습니다. 세상을 잊었기에 다시 잘 지켜보았더니 이레가 지나자 사물을 잊습디다. 사물을 잊었기에 다시 잘 지켜보았더니 아흐레가 지나자 삶을 잊게 되었습니다. 삶을 잊게 되자 그는 ‘아침 햇살 같은 밝음(朝徹)’을 얻었습니다. 아침 햇살 같은 밝음을 얻자 그는 ‘하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를 보게 되자 과거와 현재가 없어졌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없어지자 죽음도 없고 삶도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外天下 - 外物 - 外生(忘我) - 朝徹 - 見獨 - 無古今 - 不死不生).
20. (어지러움 속에 평온)
삶을 죽이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삶을 살리는 사람은 살지 못합니다. 사물을 대할 때, 보내지 않는 것이 없고, 맞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으며, 허물어뜨리지 않는 것이 없고, 이루는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를 일러 어지러움 속의 평온이라 합니다. 어지러움 속에 평온이란 어지러움이 지난 다음에는 온전한 이룸이 있다는 뜻입니다.“
21. (부묵의 아들에게 들었고)
남백자규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디서 이런 것을 들었습니까?”
여우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부묵(副墨, 버금 먹)의 아들에게 들었고, 부묵의 아들은 낙송(洛誦, 읊는 이)의 손자에게 들었고, 낙송의 손자는 첨명(瞻明, 잘 보는 이)에게 들었고, 첨명은 섭허(聶許, 잘 듣는 이)에게 들었고, 섭허는 수역(需役, 일 잘하는 이)에게 들었고, 수역은 오구(於구, 노래 잘하는 이)에게 들었고, 오구는 현명(玄冥, 그윽한 이)에게 들었고, 현명은 삼료(參廖, 빈 이)에게 들었고, 삼료는 의시(疑始, 처음 같은 이)에게 들었습니다.
(글을 읽되 거기에 매이지 말고 읽어라. 그것을 오래오래 구송하고, 맑은 눈으로 그 뜻을 잘 살핀 다음, 그 속에서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마저도 알아들을 수 있게 바로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즐거움과 감격을 노래하라. 그리하면 그윽한 경지, 조용하고 텅 빈 경지를 체험한 다음 시원의 도와 하나 되는 경지에 이르리라.)
22. (삶과 죽음이 한 몸)
자사(子祀, 제사 선생), 자여(子輿, 가마 선생), 자려(子犁, 쟁기 선생), 자래(子來, 오심 선생) 네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가 없음으로 머리를 삼고, 삶으로 척추를 삼고, 죽음으로 꽁무니를 삼을 수 있을까? 누가 죽음과 삶, 있음과 없음이 모두 한 몸(一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사람과 벗하고 싶네.”
네 사람은 서로 쳐다보고 웃었습니다. 마음에 막히는 것이 없어 결국 모두 벗이 되었습니다.
23. (몸을 오그라들게 한 조물자)
자여(子輿)에게 갑자기 병이 나서, 자사(子祀)가 문병을 했습니다. 자여가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저 조물자. 나를 이처럼 오그라들게 하다니.”
그의 등은 곱추처럼 굽고, 등뼈는 불쑥 튀어나오고, 오장이 위로 올라가고, 턱은 배꼽에 묻히고, 어깨가 정수리보다 높고, 목덜미 뼈는 하늘을 향하고, 음양의 기(氣)가 어지러워졌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했습니다. 비틀거리며 우물에 가서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아, 정말 조물자가 나를 이렇게 오그라뜨렸구나.”
24. (현해(懸解), 순리에 따르는 것)
자사가 물어 보았습니다. “자네는 그게 싫은가?”
“천만에, 싫어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내 왼팔이 점점 변하여 닭이 된다면, 나는 그것으로 새벽을 깨우겠네. 내 오른팔이 차츰 변하여 활이 된다면, 나는 그것으로 새를 잡아 구워 먹겠네. 내 뒤가 점점 변하여 수레바퀴가 되고 내 정신이 변하여 말(馬)이 되면, 나는 그것을 탈 터이니 다시 무슨 탈것이 필요하겠나. 무릇 우리가 삶을 얻은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요, 우리가 삶을 잃는 것도 순리일세.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에 따르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여들 틈이 없지. 이것이 옛날부터 말하는 ‘매달림에서 풀려나는 것(현해(懸解))’이라 하는 걸세. 그런데도 이렇게 스스로 놓여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세상의 모든 사물은 하늘의 오램을 이기지 못하는 법. 어찌 이를 싫어하겠는가?”
25. (벌레의 팔뚝으로)
갑자기 자래에게 병이 났습니다. 숨이 차서 곧 죽을 것 같아 부인과 아이들이 둘러앉아 울었습니다. 그 때 문병 간 자려가 “자, 저리들 비키세요. 돌아가는 분을 놀라게 하지 마세요.” 하더니 문에 기대어 자래에게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저 조화. 자네를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자네를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 것일까? 자네를 쥐의 간으로 만들려나? 벌레의 팔뚝으로 만들려나?”
26. (음양과 사람이 관계는)
자래가 말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동서남북 어디를 가라해도 자식은 그 명을 따르는 것. 음양과 사람의 관계는 부모 자식간의 관계 정도가 아닐세. 음양이 나를 죽음에 가까이 하는데 듣지 않는다면, 나는 고집스런 자식. 음양에 무슨 죄가 있나. 대저 대지는 내게 몸을 주어 싣게 하고, 삶을 주어 힘쓰게 하고,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하지. 그러니 삶이 좋으면 죽음도 좋다고 여길 수밖에.
27. (대장장이 같은 조화자)
이제 큰 대장장이가 쇠를 녹여 주물을 만드는데, 쇠가 튀어나와 ‘저는 반드시 막야(鏌鎁, 오나라 우장이 왕을 위해 만든 명검)가 되겠습니다’ 한다면 그 대장장이는 필시 그 쇠를 상서롭지 못한 쇠라 할 것일세. 이제 내가 사람으로 나왔다고 해서 ‘사람의 모양만, 사람의 모양만’ 하고 외친다면, 조화자는 필시 나를 상서롭지 못한 인간이라고 할 것일세. 이제 하늘과 땅이 큰 용광로이고 조화가 큰 대장장이라면, 무엇이 되든 좋은 것 아니겠는가? 조용히 잠들었다가 홀연히 깨어나는 것.“
28. (마음에 막히는 것이 없어)
자상호(子桑戶, 뽕나무 문 선생), 맹자반(孟子反, 맹반대 선생), 자금장(子琴張, 거문고 당기기 선생), 셋이 모여 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가 사귐이 없는 데서 사귈 수 있고, 서로에게 하지 않는 데서 함을 실행할 수 있겠는가? 누가 하늘에 올라 안개 속을 노닐고, 무극(無極)에서 자유롭게 다니며, 서로 삶을 잊어버리고 끝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세 사람은 서로 쳐다보고 웃었습니다. 마음에 막히는 것이 없어 결국 모두 벗이 되었습니다.
29. (이제 참됨으로 돌아갔는데)
얼마 동안 아무 일 없이 지내다가 자상호가 죽었습니다. 아직 장례를 치르기 전에 공자가 이 말을 듣고 제자 자공(子貢)을 보내 일을 돕도록 했습니다. [자공이 가보니] 한 사람은 노래를 짓고 또 한 사람은 거문고를 타면서, 목소리를 합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아, 상호여. 아, 상호여. 그대 이제 참됨으로 돌아갔는데, 우리는 아직 사람으로 있구나. 아.”
자공이 급히 앞으로 나아가 말했습니다. “감히 물어보겠습니다. 주검을 앞에 놓고 이렇게 노래 부르는 것이 예(禮)입니까?”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고 웃었습니다.
“이 이가 어찌 예의 뜻을 안단 말인가?”
30. (세상 밖에서 노니는 사람들)
자공(子貢)이 돌아가 공자에게 아뢰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입니까? 바른 행동은 전혀 없고, 자기의 외모도 잊어버린 채 주검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으니, 이런 사람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 세상 밖에서 노니는 사람들. 나는 세상 안에서 노닐 뿐. 밖과 안은 서로 만날 수 없는 법. 내가 너를 보내 문상하게 했으니, 내 생각이 좁았구나.
31. (물질을 빌려 몸을 이루는 것)
그 사람들은 조물자와 함께하여 하늘과 땅의 일기(一氣)에서 노니는 사람들. 그들에게 삶이란 마치 군살이 붙거나 혹이 달린 것과 마찬가지요, 죽음은 부스럼을 없애 버리거나 종기를 터뜨린 것과 같다. 도대체 이런 사람들이 어찌 삶과 죽음의 우열을 따지겠는가? 여러 가지 물질을 잠시 빌려 몸을 이루는 것. 간이니 쓸개 같은 것도 잊고, 귀니 눈이니 하는 것도 놓아둔 채, 끝과 시작을 계속 반복할 뿐. 그 시작과 마지막을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을 잊고 티끌과 먼지 밖에서 유유히 다니고, ‘함이 없는(無爲) 함’에 자유로이 노닌다. 이런 사람들이 어찌 구차스럽게 세속의 예 따위를 따라가면서 뭇사람의 눈에 띄려 하겠는가?“
32. (도에서 서로 잊는다)
자공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어떤 세계에 의지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늘의 벌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너와 함께 세속에 머물 것이다.”
자공이 물었습니다. “그 세계가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고, 사람은 도(道)에서 살지. 물에서 사는 것들은 연못을 파 주면 거기서 영양분을 받아 살아갈 수 있고, 도에서 사는 사람들은 일을 저지르지 않고 가만두면 삶이 안정될 수 있다. 그래서 이르기를 ‘물고기는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사람은 도에서 서로 잊는다.’ 했다.”
“그 이상스런 사람들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이상스런 사람’이란 보통 사람과 비교해서 이상할 뿐, 하늘과는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늘의 소인이 사람에게는 군자요, 사람의 군자가 하늘에는 소인이라’ 한 것이다.”
33. (상(喪)을 치르면서 슬퍼하지 않다)
안회(顔回)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맹손재(孟孫才)는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곡은 하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으로 근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상(喪)을 치르면서 슬퍼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세 가지가 없었는데도 상을 잘 치렀다는 소문이 노나라에 다 퍼졌습니다. 실제로 그렇지도 않은데 어떻게 이름이 날 수 있습니까? 정말 이상합니다.”
34. (다른 변화를 기다리고 있을 뿐)
공자가 말했습니다. “맹손씨는 할 일을 다 했다. 보통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더 앞선 사람이다. 사람들은 장례를 간소하게 하고 싶어도 못했는데 최대한 간소화한 셈이다. 맹손씨는 사는 까닭이 무엇인지, 죽는 까닭이 무엇인지, 또 앞서가야 할 까닭이 무엇인지, 뒤따라야 할 까닭이 무엇인지 모두 잊어버린 사람이다. 그 사람은 변화 과정에서 한 사물처럼 되어, 알지 못하는 다른 변화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또 그가 변화하려 한다면 그가 아직 변화하지 않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가 이미 변화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나와 너는 지금 꿈을 꾸고 있고, 이 꿈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
35. (사물과 편안히 어울려)
더욱이 맹손씨의 몸에는 변화가 있지만 마음은 상처를 입지 않는다. 집은 바꾸지만, 죽지 않는다. 맹손씨는 혼자 깨친 사람. 사람들이 곡을 하니까 자기도 곡을 하는 건 그에게 예사스러운 일이다. 또 사람들이 ‘나는 나일 뿐’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나’가 정말 ‘나’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너는 꿈에 새가 되어 하늘에 오르기도 하고, 물고기가 되어 연못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지. 지금 이렇게 말하는 자체가 깨어난 상태인지 꿈꾸는 상태인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웃는 것이 낫고, 웃음을 즐기는 것보다는 사물과 어울리는 것이 더 나으니, 사물과 편안히 어울려 변화를 잊은 채 텅 빈 하늘로 들어가도록 하라.“
36. (인의(仁義)와 시비(是非)로 막힌 마음)
의이자(意而子, 의지의 선생)가 허유(許由)를 만나러 갔습니다. 허유가 말했습니다. “요 임금이 자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던가?”
의이자가 대답했습니다. “요 임금이 제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인의(仁義)를 실천하고, 시비(是非)를 분명히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무엇 때문에 여길 찾아왔는가? 요 임금이 벌써 자네 이마에 인의로써 먹물을 새겨 넣고 시비로 자네 코를 자르는 형벌을 가했는데, 자네가 어찌 저 자유분방하고 유동성 많은 도(道)의 세계에서 노닐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저는 그 언저리에서라도 노닐고 싶습니다.”
“그럴 수 없네. 눈먼 자는 얼굴의 아름다움이나 수놓은 옷의 색깔과 상관이 없는 것이니까.”
37. (노닐어야 할 곳)
의이자가 말했습니다. “미인 무장(無莊)이 그 아름다움을 잊고, 장사 거량(據梁)이 그 힘을 잊고, 황제(黃帝)가 그 앎을 잊은 것은 모두 용광로 속에서 다시 단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조물자가 저의 먹물을 지워주고, 저의 베어 나간 코를 되살려 저를 온전히 한 다음 선생님을 따를 수 있게 해줄지 누가 알겠습니까?”
허유가 대답했습니다. “아, 그럴지 모르겠군. 내 자네에게 말해 줌세. 내 스승, 아, 내 스승. 스승은 만물은 이루어 놓지만 스스로 의롭다 하지 않고, 만세에 혜택을 베풀지만 특별히 편애하는 일이 없고, 옛날보다 오래되었으나 늙지 않고, 하늘을 덮고 땅을 받들고, 여러 가지 모양을 깎아 내지만 재주를 부리지 않네. 여기가 바로 자네가 노닐어야 할 곳일세.”
38. (좌망(坐忘), 앉아서 잊다)
안회(顔回)가 말했습니다. “저는 뭔가 된 것 같습니다.”
공자가 물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저는 인(仁)이니 의(義)니 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좋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얼마 후 안회가 다시 공자를 뵙고 말했습니다. “저는 뭔가 된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저는 예(禮)니 악(樂)이니 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좋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얼마 지나 안회가 다시 공자를 뵙고 말했습니다. “저는 뭔가 된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저는 좌망(坐忘)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자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좌망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손발이나 몸을 잊어버리고, 귀와 눈의 작용을 쉬게 합니다. 몸을 떠나고 앎을 몰아내는 것. 그리하여 ‘큰 트임(大通)’과 하나 됨.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좌망입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하나가 되면 좋다 [싫다]가 없지. 변화를 받아 막히는 데가 없게 된다. 너야말로 과연 어진 사람이다. 청컨대 나도 네 뒤를 따르게 해다오.”
39. (운명의 막다른 골목)
자여(子輿, 가마 선생)와 자상(子桑, 뽕나무 선생)은 벗이었습니다. 장마 비가 열흘이나 계속 내리던 어느 날 자여가 생각했습니다. ‘자상이 분명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자여는 먹을 것을 싸가지고 그에게 갔습니다. 자상의 집 문 앞에 이르자,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하듯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버님이실까 어머님이실까, 하늘이실까, 사람들일까.”
힘에 겨워 목소리가 겨우 나오고, 가사도 곡에 맞지 않게 나왔습니다.
자여가 들어가 물었습니다. “자네 노래가 어찌 그런가?”
자상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나를 이처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온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아직 알 수가 없네. 부모님이 어찌 내가 이렇게 가난하길 바라셨겠는가? 하늘은 사심 없이 모두를 다 같이 덮어 주고, 땅은 사심 없이 모두를 다 같이 떠받아 주고 있으니 어찌 하늘과 땅이 사사롭게 나만을 가난하게 하였겠는가? 도대체 누구일까 알아보는데 알 길이 없네. 그런데도 내가 이처럼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으니, 운명일 따름이겠지.”
2013.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