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관념적/현실적으로 탐구/논/설하는
우주 만물의 원리나 현상적인 설명,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는
결국 인간 스스로의 본성(행복)을 찾기 위한 수단인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때문에 그 자체가 옳다 그르다, 낫다 못하다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를 얼마나 수월하게 해주는가라는 측면에서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우선,
理氣論(이기론)은 우주의 기본원리와 인간의 본성을 理와 氣로 설명하는 사유방식이라 하겠습니다.
理는 모든 사물의 생성과 변화의 원리를 주관하는 형이상적인 관념적인 것이고,
氣는 理의 원리가 현상적으로 구체화되는 요소로 형이하적인 것으로 상정합니다.
그리고,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인 인간의 선한,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의미하고
칠정은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의 감정으로서 인간이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가변적인 기질을 말합니다.
퇴계는 사단은 理가 發(발)한 것이고 칠정은 氣가 발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퇴계의 이기호발설은 이기공발설 또는 이기양발설이라고도 합니다.
호발설 또는 양발설이라고 하는 것은 理와 氣가 다같이 발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곡은 理는 발할 수 없고 발하는 것은 氣뿐이라고 합니다.
즉 사단과 칠정이 모두 氣가 발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퇴계와 고봉(高峰) 기대승의 7년 서신의 결정체인 사단칠정론에서
고봉이 퇴계의 이기양발설의 논리가 부당함을 역설하고 그와 같은 논점을 후대 율곡이 계승함)
그래서 율곡의 학설을 기발이승일도설이라고 합니다.
우주 만물의 원리나 현상적인 설명,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는
결국 인간 스스로의 본성(행복)을 찾기 위한 수단인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때문에 그 자체가 옳다 그르다, 낫다 못하다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를 얼마나 수월하게 해주는가라는 측면에서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우선,
理氣論(이기론)은 우주의 기본원리와 인간의 본성을 理와 氣로 설명하는 사유방식이라 하겠습니다.
理는 모든 사물의 생성과 변화의 원리를 주관하는 형이상적인 관념적인 것이고,
氣는 理의 원리가 현상적으로 구체화되는 요소로 형이하적인 것으로 상정합니다.
그리고,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인 인간의 선한,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의미하고
칠정은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의 감정으로서 인간이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가변적인 기질을 말합니다.
퇴계는 사단은 理가 發(발)한 것이고 칠정은 氣가 발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퇴계의 이기호발설은 이기공발설 또는 이기양발설이라고도 합니다.
호발설 또는 양발설이라고 하는 것은 理와 氣가 다같이 발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곡은 理는 발할 수 없고 발하는 것은 氣뿐이라고 합니다.
즉 사단과 칠정이 모두 氣가 발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퇴계와 고봉(高峰) 기대승의 7년 서신의 결정체인 사단칠정론에서
고봉이 퇴계의 이기양발설의 논리가 부당함을 역설하고 그와 같은 논점을 후대 율곡이 계승함)
그래서 율곡의 학설을 기발이승일도설이라고 합니다.
퇴계 이황 |
理 -> 사단 - 순수 |
理氣二元論 |
율곡 이이, (기대승) |
理 : 氣의 존재근거(동인) |
理氣一元論 |
이러한 차이를 실천적 수양론과 연결하여 보면,
퇴계는 사단이 理가 발한것이라 하고 있기 때문에 선정의 근원을 理에 둡니다.
그리하여 도덕수양, 즉 존양성찰의 공부는
理를 왕성하게 하여 언제 어디서라도 氣를 지배하도록 함으로써,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선한 본성(=사단)이 제대로 발현되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율곡의 경우, 理는 氣의 존재를 규정해주는 근거인 만큼(소이연),
마음의 작용에 선악이 발생하는 것은 理로 인한 것이 아니라,
理를 싣고서 이것을 구체화시키는 氣의 성질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氣質을 변화, 개선시켜 청명하고 순수한 본연의 氣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다시말해서, 퇴계가 본연지성의 회복을 강조한 데 비해,
율곡은 氣의 본연 즉 氣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중요한 차이라 할 것입니다.
즉 이성이 主가 되는 조정기능을 강조함으로써
욕망을 철저히 이성의 명령, 통제 아래 두려는 경향이 퇴계였다면,
율곡은 이성이 욕망에서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함으로써
욕망의 자체 정화를 강조하려는 경향이었다고 이해하면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쉬울것입니다.
이상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모은 자료를 비교 요약한 것입니다.
理를 왕성하게 하여 언제 어디서라도 氣를 지배하게 하든지(퇴계),
氣質을 변화시켜 청명하고 순수한 본연의 氣를 회복하든지(율곡)
두 어른의 가르키는 목적지는 다르지 않겠지만
제게 있어서는 율곡의 설명이 머리로의 이해는 수월한듯 보입니다.
어쨋든, 이러한 설명이
퇴계와 율곡 자신만의 견해(혹은 그 추종자들의 해석) 인지
서로 자신들의 우월을 주장하기 위해 상대를 폄하하는 것이 섞여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단칠정과 관련한 퇴계와 율곡의 이러한 논의를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 논의의 근간에 선/악(순수/불순)의 규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 사회나 개인의 차원을 떠나
악을 사라지게(물리치고) 하고, 선을 드러나게(회복) 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예컨데, 전쟁은 악(나쁜 것), 평화는 선(좋은 것)이며,
전쟁을 사라지게 하고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라는 전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통상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한듯이 받아들이지만,
그런 삶을 살고자(실천하고자) 할 때 그 행동만을 흉내내는 혼란에 빠지거나,
다같이 전쟁에 참여한 당사자이면서도
무작정 자신은 선, 상대는 악이라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무작정 자신은 선, 상대는 악이라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유아적인 정치의 세계를 보노라면 극명하게 드러나지요.
'민의를 하늘의 뜻'이라거나 '국민 뜻에 따라야 한다'는 말까지는 옳다고 해도
그 민의를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자기도 모르게(? ^^) 해석하는 일 말입니다.
어떤 사례를 가지고 보더라도
'나(self)'를 벗어나지(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선악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인 세계를 탈피하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악의 축^^이 되는 상대방의 손아귀(공격 범위)를 헤어나지 못합니다.
결국 달팽이 뿔 위에서 자웅을 겨루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물'안'의 개구리라는 말이 어찌 개구리를 두고 한 말이었겠습니까? ^^)
(우물'안'의 개구리라는 말이 어찌 개구리를 두고 한 말이었겠습니까? ^^)
두 어른의 말씀을 실천적인 '수양'의 의미로 새겨보면
결국 '자기(self; being self-centered, egocentric)를 초월'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 말을 모르지 않고, 이기적으로만 살고 싶어하지는 않지만,
(비록 그렇게 살더라도 자신만은 예외로 두는 착각을 하고 있거나)
무의식적인 또 하나의 자기중심적 욕구가 가로막고 있기에
'부디 깨어있으라'는 말이 나왔는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