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Siddhartha)는?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의 작품인'싯다르타' 책의 표지에, 이 책은 어떠한 책인가를
헤세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가르쳐질 수 없다는 것.
이 깨달음을 나는 일생에 꼭 한번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 시도가 바로 싯다르타이다."
싯다르타의 깨달음...
p.32) 고행자들, 사문들의 무리를 떠나며...
침잠이란 무엇인가? 육체를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단식이란 무엇인가? 호흡을 멈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로 부터 도망치는 것이며, 그것은 자아 상태의 고통으로부터 잠시 동안 빠져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인생의 고통과 무의미함을 잠시 동안 마비시키는 것이야. 이러한 도망, 이러한 잠시 동안의 마비는 소몰이꾼도 여인숙에서 쌀막걸리 몇 사발이나 잘 발효한 야자유를 마시고 취하면 겪는 일이네. 그런 사람도 취하면 자기 자신의 자아를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며, 인생의 고통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며, 결국 잠시 마비 상태를 겪게 되네. 그 사람은, 쌀 막걸리 사발 위에 곯아떨어진 상태로, 싯다르타와 고빈다가 기나긴 수행 과정을 거친 후에야 자신들의 육신으로부터 빠져나올 경우 도달하게 되는 경지, 그러니까 비아의 상태에 잠시 머무르는 경지와 똑같은 그런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이야기야.
pp.60-61)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자아의 의미와 본질
도대체 가르침으로부터, 스승들한테서 네가 배우려고 하였던 것이 무엇이며, 너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던 그들이 도저히 가르쳐줄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이지? 나는 바로 자아의 의미와 본질을 배우고자 하였던 것이다. 나는 바로 자아로부터 빠져나오려 하였던 것이며, 바로 그 자아를 나는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었고, 그것을 단지 기만할 수 있었을 뿐이고, 그것으로부터 단지 도망칠 수 있었을 뿐이며, 그것에 맞서지 못하고 단지 몸을 숨길 수 있을 따름이었다. 진실로,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나의 자아만큼, 내가 살아있다는 이 수수께께, 내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별이 되는 별다른 존재라는 이 수수께끼, 내가 싯다르타라고 하는 이 수수께끼만큼 나를 그토록 많은 생각에 몰두하게 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세상의 어떤 것 보다도 나 자신에 대하여, 싯다르타에 대하여 가장 적게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 싯다르타가 나에게 그토록 낯설고 생판 모르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는 것, 그것은 한 가지 원인, 딱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나를 너무 두려워하였으며, 나는 나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트만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바라문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자아의 가장 내면에 있는 미지의 것에서 모든 껍질들의 핵심인 아트만, 그러니까 생명, 신적인 것, 궁극적인 것을 찾아내기 위하여, 나는 나의 자아를 산산조각 부수어버리고 따로따로 껍질을 벗겨내는 짓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나한테서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p.75) 사색만으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를 깨달을 수 없었음을 돌아보며...
감각과 사유 두 가지 다 상당히 좋은 것이었다. 그 두 가지의 배후에는 궁극적인 참뜻이 숨어 있었다. 두 가지 모두 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고, 더불어 유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도 경시되거나 과대평가 되어서는 안되었으며, 그 두 가지로부터 가장 내밀한 것의 비밀스러운 소리들을 들어야 할 것이었다. 그는, 그 소리가 얻으려고 노력해 보라고 명령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리라고, 그 소리가 멈추어 있으라고 권하는 장소 이외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멈추어 있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무엇 때문에 부터 고타마는 일찍이 많고도 많은 시간들 중에 하필이면 그 시간에 보리수 아래에서 좌정하여 정각(正覺)을 얻을 수 있었던가? 그는 한 음성을 들었었다. 그 나무 밑에 가서 휴식을 취하라고 명령하는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었었다. 그리고 그는 금욕, 제사, 목욕 재계나 기도,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잠자는 것과 꿈꾸는 것, 그 어느 것도 택하지 않았었으며, 그는 내면의 소리에 따랐었다. 이처럼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오로지 그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것, 이처럼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일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이었으며,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pp.123-124) 달라져 보이는 세상에 매혹되어 속세의 삶을 살다가 다시 그 쾌락의 삶을 떠나보내며...
그들의 목표가 자기의 목표가 될 수는 없고, 마찬가지로 그들의 걱정 근심도 자기의 걱정 근심이 될 수는 없으며, 또 카마스와미류의 인간들의 전체 세계라는 것이 사실 자기에게는 고작해야 단지 한 판의 놀이, 구경삼아 보는 한 바탕의 춤, 한 마당의 희극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단지 카말라만이 자기에게 사랑스러운 존재였고, 자기에게 소중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가 아직도 그런 존재일까? 자기가 아직도 여전히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일까, 또는 그녀 역시 여전히 자기를 필요로 하고 있을까? 그 끝없는 유희를 위하여 사는 것이 과연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아니다,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런 유희야말로 바로 윤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린애들의 유희인 것이다. 아마도 한 번, 두 번, 열 번 정도는 애정을 지니고 놀아볼 만한 유희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러나 계속하여 언제까지나 영원히 그 유희를 반복한다면 과연 어떨까? 그때 싯다르타는 이 유희가 끝났다는 것을, 자기가 이 유희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pp.130-131) 실패로 돌아간 삶을 박살내어, 비웃고 있는 신들에게 던져버리려는 순간...
두 눈을 감은 채 그는 죽음을 향하여 떨어질 참이었다. 바로 그때, 그의 영혼의 후미진 곳에서, 지칠 대로 지친 삶의 과거로부터 어떤 소리가 경련하듯 부르르 떨며 울려왔다. 그것은 한 음절로 된 한마디의 말이었는데,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혼잣말로 웅얼거리듯 그 말을 내뱉었다. 그것은 모든 바라문들이 기도를 시작하는 말이자 마치는 말로서, [완전한 것]이나 [완성]을 뜻하는 성스러운 [옴]이었다. 그리고 그 [옴]이라는 소리가 싯다르타의 귓전을 울리는 바로 그 순간, 깊이 잠들어 있던 그의 정신이 갑자기 눈을 뜨고 자신의 행위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싯다르타는 소스라치듯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자기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이처럼 길을 잃고서, 이처럼 갈피를 못 잡고 헤매며 자기한테서 모든 지식을 다 떠나보내 버린 결과 죽음을 찾아 헤맬 수도 있는 그런 지경까지, 육신을 소멸시킴으로써 안식을 얻고 싶어하는 욕망이, 이 어린아이 같은 욕망이 자기의 내면에서 크게 자라나게 될 수도 있는 지경까지 와 있단 말인가! 지난 몇 해 동안 온갖 번뇌와 온갖 각성과 온갖 절망도 해내지 못하였던 일을, 옴이 그의 의식 속으로 뚫고 들어온 바로 이 순간이 해냈으니, 그는 비참함과 미망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자신을 깨달았던 것이다. '옴!' 그는 혼잣말로 소리를 내었다. '옴!'하고 말이다. 그러자 그는 바라문을 알게 되었으며, 생의 불멸성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모든 신성(神性)을 다시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깨달음은 단지 섬광처럼 스쳐가는 한 순간에 불과하였다.
pp.157-158) 강물로부터 배운,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
'강물은 어디에서나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강의 원천에서나, 강 어귀에서나, 폭포에서나, 나루터에서나, 시냇물의 여울에서나, 바다에서나, 산에서나, 도처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강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 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다.' 그것을 배웠을 때 나는 나의 인생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의 인생도 한 줄기 강물이었습니다. 소년 싯다르타는 장년 싯다르타와 노년 싯다르타로부터 단지 그림자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을 뿐, 진짜 현실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싯다르타의 전생(前生)들도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었으며, 싯다르타의 죽음이나 범천(梵天)에로의 회귀도 결코 미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으며,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현존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pp.197-198) 수많은 소리가 어울어진 강물의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며...
싯다르타는 귀를 기울였다. 그는 이제 온통 귀기울여 듣는 자가 되어, 온통 듣는 데 몰두하였으며, 마음을 온통 비운 채, 온통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이제는 귀기울여 듣는 법을 끝까지 다 배웠음을 느꼈다. 진작부터 그는 자주 이 모든 소리들을, 그러니까 강물 속에 들어 있는 이 수 많은 소리들을 들어왔었지만, 오늘은 그 소리의 울림이 새로웠다. 그는 더 이상 그 수 많은 소리들을 서로 구분할 수가 없었으니, 기쁜 소리를 슬픈 소리와 구분할 수도, 어린애 소리를 어른 소리와 구분할 수도 없었다. 그 모든 소리들이 함께 어루러져 있었다. 그리움에 애타는 탄식 소리, 깨닫는 자의 웃음 소리, 분노의 외침 소리와 죽어가는 사람의 신음 소리,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이 수천 갈래로 얽혀서 서로 밀착하여 결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합해져서, 그러니까 일체의 소리들, 일체의 목적들, 일체의 그리움, 일체의 번뇌, 일체의 쾌락, 일체의 선과 악, 이 모든 것들이 함께 합해져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합해져서 사건의 강을 이루고 있었으며, 생명의 음악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싯다르타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이 강에, 이 수천 가지 소리가 어우러진 노래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가 고통의 소리에도 웃음 소리에도 귀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어떤 특정한 소리에 묶어두거나 자신의 자아와 더불어 그 어떤 특정한 소리에 몰입하지 않고 모든 소리들을 듣고, 전체, 단일성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 수천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한 개의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완성이라는 의미의 옴이라는 말이었다.
pp.210-211) 친구 고빈다에게 자기에게 떠올랐던 생각들을 말하며...
"이 돌멩이는 단지 한 개의 돌멩이일 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며, 그것은 마야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순환적인 변화를 거치는 가운데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정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나는 그것에도 가치를 부여해 주는 바이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거야.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 "이 돌멩이는 돌멩이다. 그것은 또한 짐승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신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부처이기도 하다. 내가 그것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그것이 장차 언젠가는 이런 것 또는 저런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항상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 그러니까 그것이 돌멩이라는 사실, 그것이 지금 그리고 오늘 나에게 돌멩이로 보인다는 사실, 바로 그러한 사실 때문에 나는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며, 돌멩이에 나 있는 갖가지 줄무늬와 움푹 패어있는 구멍 하나하나, 노란색이나 회색을 띠고 있는 돌멩이의 빛깔, 돌멩이의 단단한 정도, 두드릴 때 돌멩이가 내는 소리, 말라 있거나 물기가 있는 돌멩이의 표면, 그런 것에서 나는 돌멩이의 가치와 의의를 발견하게 돼. 돌멩이를 만져보면 그 중에는 촉감이 기름이나 비추처럼 미끌미끌한 것도 있고, 나뭇잎 같은 것도 있고, 모래 같은 것도 있지. 모든 돌멩이는 하나 하나가 제각기 독특한 것이며, 제각기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옴을 읊조리고 있으니, 모든 돌멩이 하나하나가 바라문인 셈이지.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꼭 마찬가지로 그 돌멩이는 돌멩이이기도 하며, 기름 같은 느낌을 주거나 비누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내 마음에 들어. 바로 이 점이 나에게는 경이롭고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겨져.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내가 이문제에 대해 말하는 일이 없으면 해. 말이란 신비로운 참뜻을 훼손해 버리는 법일세. 무슨 일이든 일단 말로 표현하게 되면 그 즉시 본래의 참뜻이 언제나 약간 달라져 버리게 되고, 약간 불순물이 섞여 변조되어 버리고, 약간 어리석게 되어버린다는 이야기야. 그래. 그렇지만 이것도 매우 좋은 일이며 그리고 내 마음에도 아주 쏙 드는 일이야. 어느 한 사람에게는 소중한 보배이자 지혜처럼 여겨지는 것이 어떤 다른 사람에게는 항상 바보같은 소리로 들린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나는 동의하고 있어.
pp.213-214) 사물이라는 것은 마야의 미혹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에 대해...
나에게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네. 그 사물들이 가상이든 아니든 그것은 별 문제가 안돼. 만약 그 사물들이 가상이라면, 그렇다면 나 역시 사실 가상적 존재인 셈이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 사물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나와 똑같은 종류인 셈인지. 그 사물들이 나와 동류의 존재라는 사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나는 그 사물들을 그토록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이고 그토록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거야. 그 사물들이 나와 동류라는 사실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사랑할 수 있어. 자네가 들으면 그런 가르침도 다 있느냐며 비웃을 터이지만 이것도 아무튼 하나의 가르침이야. 사랑이라는 것 말일세, 고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이 세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일,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일, 이 세상을 경멸하는 일은 아마도 위대한 사상가가 할 일이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p.215) 그 사랑 또한 미망(迷妄)이라는 부처의 말에 대해...
내가 사랑에 관하여 한 말들이 고타마가 하신 말씀들과 모순이 된다는 것을, 아무튼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이 된다는 것을 내가 부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말들을 그토록 불신하는 거야. 왜냐하면 말야, 나의 말과 고타마의 말씀이 실제로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착각 때문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야. 나는 내가 고타마와 의견이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 분이 어떻게 사랑을 모르실 수 있겠는가. 무릇 인간 존재라는 것이 덧없고 허무하다는 것을 인식하셨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중생을 그토록 사랑하셔서, 온통 노고로 가득 찬 길고도 긴 한평생 동안 오로지 인간 중생을 도와주고 가르치는 데 온 힘을 다 쏟으셨던 그 분이 아닌가! 그 분, 즉 자네의 그 위대한 스승의 경우에 비추어 보더라도 나에게는 말보다는 사물이 더 마음에 들며, 그 분의 행위와 삶이 그 분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며, 그 분의 손짓이 그 분의 사상들 보다 더 중요해. 나는 그 분의 위대성이 그 분의 말씀, 그 분의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분의 행위, 그 분의 삶에 있다고 생각해.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 친구 고빈다에게 말 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p.206)"
이 생각은 젊은 싯다르타가
이러한 (남에게 전달될 수 없다는) 예감을 가지고 많은 스승들 곁을 떠나
긴 여정을 거쳐
마침내 '강'을 스승으로 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스승님께 추천을 받아
2003년 여름, 두 번을 연거푸로 읽고서는
훗날 그 때의 느낌(독후의 감)을 돌아보기 위해
이야기가 전개되는 순서대로 몇가지 뽑아 남겨둔 것을 옮겨둡니다.
2009. 08.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