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일독코자 별러왔던 「한비자(韓非子)」를 읽었습니다.
그(와 일가를 이루던 제자들)의 치밀한 글에서
인간에 대한 자비나 사랑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다스림의 큰 도(道) 보다는
지배를 위한 술(術)에 치중한 까닭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더 구체적으로는 군신간)에 대해 이러한 가정을 깔고 있습니다.
"군신은 혈육에 의해 맺어진 관계가 아니며
단지 신하는 군주의 권세에 눌리어 할 수 없이 섬기고 있을 뿐입니다." - (15. 비내편)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의 일신에 손해를 초래하면서까지
남을 위하여 힘을 다하지 않는 법이므로,
나라를 위하여 진력하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함으로써
비로소 민심을 끌 수 있는 것입니다." - (43. 궤사편)
"신하를 제어하며, 능히 신하로 하여금 명령을 지키게 하고
그 직무를 충실히 완수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두 개의 자루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자루라 함은 형벌과 은덕(흔히 채찍과 당근)을 말합니다." - (5. 이병편)
어쨋거나, 현대 이익 추구의 대표적인 단위인
기업 조직의 고용주와 종업원의 관계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점에서,
또한 계층, 직무와 책임이 있는 인간 조직에서 읽고 새겨볼 만한 구절들이 눈에 띄입니다.
깊은 이해의 노력 없이
입맛에 맞는 일부만 똑따와서 휘두르지 않을까
참으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구절이 많습니다만,
다음에서 일부를 옮겨 봅니다.
도(道)라고 하는 것은 만물의 시초인 것입니다.
만물은 도의 일원(一元)에서 생기는 것인데, 이것은 노자(老子)가 한 말입니다.
그 자연의 도를 세우는 것이므로
군주된 자에게는 단순히 정치를 해나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지도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도라는 것을 잘 분간할 수 있으면
시비, 곧 모든 선과 악의 구별을 명백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밝은 군주는 도를 지켜야 합니다.
도를 지킴으로써 만물의 근원을 알고, 기준을 다스려서 인간의 선악의 단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군주는 마음을 비우고 고요한 채로 신하를 대하고,
신하가 스스로 말하게 하며,
그 책임을 지우고 일이 자연스럽게 실행되기를 기다립니다.
허(虛)하면 상대의 마음을 알게되고,
고요하면 상대의 움직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됩니다.
말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말하게 하고, 일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일하도록 합니다.
그 언행이 일치하게 되면
군주는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어도 만사는 실정(實情)을 드러내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군주된 사람은 자기의 바라는 바를 나타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하고 싶다든지
이런 것을 좋아한다든지 하는 마음을 신하에게 알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군주가 그의 바라는 바를 나타내고 자기의 좋고 싫은 것을 밝히면,
신하된 자는 마음에 있는 그대로를 말하지 않고
군주의 마음에 영합하도록 꾸미게 됩니다.
또 군주된 자는 자기의 의사를 말해서는 안됩니다.
처음에는 여러 의견을 귀담아 듣도록 합니다.
만약 군주가 자기의 의사를 말해버리면,
신하된 자는 군주의 뜻에 반대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여
그 뜻에 영합한 것만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군주는 좋다든가 싫다든가 하는 말을 하지말고
다만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하고,
좋은 점이 있으면 반드시 이를 채택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신하들은
군주에게 이견(異見)이 없다고 생각하여 비로소 참된 생각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주가 좋아하는 것도 버리고
싫어하는 것도 버린다면
신하는 비로소 그 소질의 전부를 보여주게 됩니다.
또 군주가 교묘함도 버리고 지혜도 버린다면
신하는 군주의 의향을 알 길이 없어 스스로 경계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군주에게
지혜가 있다하더라도 홀로 계획을 세우지 않고
신하로 하여금 스스로 제 직분을 알게 하고,
현명하다 하더라도 과시하지 않고
군신들로 하여금 그 무용을 발휘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군주가
지혜를 버리고 나면 신하의 실정을 관찰할 수 있는 밝음(明)을 얻게 되고,
현명함을 버리고 나면 신하들이 저마다 힘써 노력하게 되므로 성과(功)를 얻게 되고,
용기를 버리고 나면 신하들이 저마다 용기를 발휘하게 되므로 국가가 강대해 지는 것입니다.
군신은 모두 그 직책을 지키고
백관은 각기 정도(正道)에 의해 그 직분을 다하며,
그 능력에 따라 일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정해진 관습으로서 길이 지켜나가야 할 도(道)입니다.
(후략)
성동호 역, 「한비자」, 홍신문화사, 1983, p.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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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가
자기의 바라는 바나 좋고 싫음을 밝히지 않음은
자신을 감추어 신하가 자신을 두려워 하도록 만든다거나,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특한 신하를 가려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하 스스로의 뜻을 제약 없이 펼치게 하되
저마다 자신의 뜻에 따라 힘써 노력한 그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태도를 몸으로 익혀
마침내 각자가 스스로 우뚝 서도록 하기 위함이겠습니다.
2009.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