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어느 시골길을 달리는데
문득 커다란 표시판이 보였다.
거기엔 이렇게 씌여 있었다.
'개조심'
조금 더 가자 또 표시판이 나타났다.
이번엔 더 큰 글씨로 씌여 있었다.
'개조심'
잠시 후 그는 농가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집 앞엔
쬐그마한 푸들 강아지가 한마리가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묻기를,
"이게 뭐요. 저렇게 쬐그만 강아지가 집을 지킬 수가 있나요?"
농부가 말하기를,
"아, 천만에 말씀을. 그러나 표시판이 지켜주죠. 암요."
사람들은 표시판과 상징, 말, 언어에 꼼짝 못하게 되었다.
그냥 믿어 버린다.
실제로 개가 있는지,
있으면 어떤 개가 있는지,
누구도 굳이 보러가지 않는다.
- 박상준 엮음, 오쇼 라즈니쉬, 배꼽, 도서출판 장원, 1991, p. 63.
길은 멀고,
해는 저물어 가고 있는데
이 '개'인지, 저 '개'인지 굳이 볼 것은 무엔가만은
(과연 개가 '개'에 불과한지는 차치하고 ^^)
그토록 자신이 추구하고,
찾아 헤매는 '행복'마저도 그렇게 대하고 있으니
안타까와서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2009.02.04)
어쨋든,
현대 소유지향의 사회에서 자동차나 집, 연인^^과 같은 소유물은
사람에 대한 능력, 지위, 가치를 상징한다고 흔히 믿는다.
자동차를 지위의 상징으로 스스로 믿기에,
(또 그런 자신이 뭔가 아니라는 느낌은 있어서,
때로는 안전을 구실로 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무리를 하더라도 가능한 더 큰 차를 타고자 원한다.
하지만,
선망하는 그 차를 소유한 사람의 면면을 따져보면
차만 보고 판단할 수 없음을,
그런 판단이 때로 위험하기 조차하다는 것을
(개조심 농장과 같은 ^^)
여러 유사한 삶의 경험들을 통하여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와 같이 깊이 있게 살펴볼 여유가 없는,
혹은 그럴만큼의 필요성이 없는 경우들이 있다는 점에서
복잡한 생활 속에서의 효율성을 위해
'상징'이라는 것은 자연스레(불가결하게) 나타나는 것이라 보인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것이 산업의 브랜드(Brand)가 아닐까 한다.
다양한 제품/서비스의 품질을 평가하는데
일반 소비자로서는 해당 지식이나 시간적인 여유가 부족할 때
바로 이 상징적인 브랜드로 손쉽게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평가에 대한 전제는 브랜드에 대한 축적된 '신뢰'라 하겠다.
기업가나 소비자,
모두가 그러한 역할을 하는 브랜드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어쩌면, 한편으로 브랜드의 효용가치는 알고 있지만
브랜드라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는 모르고 있는듯 하다.
겉으로는
고객의 만족, 행복을 추구한다면서,
정작 눈 앞의 이익(좋은 말로 단기적 성과)에만 매달려
고객의 불편이나 불이익은 아랑곳 하지도 않거나 건성적인 태도를 보이고,
스포츠 게임이 열리는 경기장과 선수들 옷에 덧칠을 하여
그 이름을 알리기에만 애쓰고,
부자(만만한?) 고객들의 돈을 훔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을 가져다 주는 흥행성 행사나 벌여서
형성되는 그것은 참된 브랜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돌아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저 상징적인 그림이나 행사로
사람의 흥미나 감성을 자극하려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도 하지만
조직의 생리를 감안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싶다.
어쨋거나,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이 본연의 일을 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다른 누구보다 더 잘, 열심히 해나갈 때
그에 대하여 차곡차곡 쌓여가는 사람들의 믿음,
그것이 참된 브랜드 가치가 될 것이다.
인간 개인의 생활 또한 이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주어진 삶에 충실하게 사는 것을 벗어난,
무엇을 가지고 이름이 만방에 알려지고, 큰 자선을 베푼들
뿌리없는 꽃과 같아 금세 시들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2009.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