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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의 태백산맥에 어린 빨치산이, 아우 내가 빨치산이 될 때는 인민을 해방시키고 좋은 의미에서 왔는데 말이야, 빨치산 선배를 보니까 무도 훔쳐 먹고 난 실망이다. 그러니까 다른 빨치산이 한 얘기가 뭐냐면, 그렇게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이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것이기에 사회주의 혁명이 위대한 거야. 이렇게 말을 해요. 근데 난 왠지 그게 찝찝했어어. 왠지 그 정도로는 안 되겠더라고. 아우씨, 그래도 나쁜 건 나쁜 거지. 게다가 그렇게 불완전한 인간인데 어떻게 역사가 좋아질 거라고 믿고 내가 가냐...
90년 초반에 나왔던 얘긴가.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민주화 양아치가 더 심하다는. 뭐 쓰면 뱉고 달면 삼키고 이리 붙고 저리 붙고 하는 정치공학적인 행보를 보면, 오히려 민주화 운동하던 사람들이 더 심하다는 소리죠. 이론을 만들어내던 영악한 사람들이 스스로 정당성을 막 만들어내서 이리저리 가져다 붙이는데, 노회한 정치인이 볼 때도 그게 참 한심해서 민주화 양아치가 더 심하다는 표현이 나온 거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무슨 진보를 하느냐. 그런 정치만 보다보니까 제가 모든 게 회의스럽고 그러던 시절인데, 그때 노무현 대통령이 나에게 뭐라고 했냐면,
“ 희정씨 그거 참 어려운 주제인데. 그게 그런 거 같아. 이런 말 있잖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사람은 안 변하는 것 같아 내가 볼 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그러니까 개체로써의 인간은 안 바뀐다는 거야. 그런데도 인류는 진보한다는 것이 신기한 것 아니냐.”
그렇게 말을 하는데, 독백처럼, 어, 그게 나한테는 몇 년을 고민하던 문제에 답을 줬어요. 그때 무슨 득도한 것처럼 중요한 대화를 주고받았던 건 전혀 아니에요. 그냥 독백처럼 한 말이에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보니까 그런 말들이 저한테는 남는 거예요. 인간이 대한 믿음이랄까. 그 대통령의 그 말씀이 지금까지 남는 거라. 개체로써의 인간은 변하지 않지만 그 개체가 모인 집단으로써의 인류는 늘 진보해 왔다. 그것이 진보주의자의 역사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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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식 정치 노선, 노무현 가문의 정치적 철학의 특징을 얘기하자면, 이 외형적으로는 세 바둑이에요. 집 바둑을 두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가 국회의원 되어야지, 내가 대통령 되어야지 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겨냥해서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와 가치라고 하는 이름의 싸움이에요.
그러니까 2002년도의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지역주의 통합, 지역주의 정치를 극복하자. 그리고 우리 툭 까놓고 반칙 없는 사회를 만들자. 이게 목표였어요. 지역주의 정치를 그만하고 특권 없고 반칙 없는 사회를 만들자. 그리고 원칙과 상식대로 살아도 손해 보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 그래서 법치주의 사회를 만들자. 요것이 정치를 하는 이유였단 말에요.
그러니까 이것을 해야 되겠는데 필요하다면 대통령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은 승패하고도 상관이 없었어요. 지든 이기든, 이 가치를 가지고 그 무대에서 싸우면 그 가치를 가지고 기여하게 되는 거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지면은 아무것도 없다고 얘길 하지만, 그건 단기 순익 얘기이고. 단기 순익이 아니라 자산 가치를 생각한다면,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죠.
노무현 가문의 정치 철학은 가치 중심이에요. 이런 가치를 가지고 싸워 나가는 것, 그게 대통령 선거가 되면 대통령 후보의 자격으로 그 싸움을 하는 거에요. 자신의 급이 국회의원이면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서 그 가치를 가지고 싸우는 거죠. 그러니까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가치를 실현할 기회가 있으면 그러면 출전을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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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뽕빨이너뷰] 안희정을 만나다.
2010.5.20.목요일
딴지총수
http://www.ddanzi.com/news/19680.html
이익과 손해를 떠나,
승패도 떠나서
자기 삶에서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던 그 모습이
당시 그가 속한 세계의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도 없었거니와,
그런 모습을 기대했다가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멍청이란 핀잔까지 받는
우리 시대에 그의 바보같은 모습은
참으로 신선하게 다가왔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노무현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마음 바닥에
대통령이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단지 그것을 그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하나의 도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퇴임 후 그가 벌일 일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참으로 안타까왔습니다.
생각컨데,
그가 대통령을 하나의 도구로 인식한 것은
그의 자신감이나 오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추구한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가치는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의무'라는 깨우침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더 큰 영향력을 필요로 했고
대통령이 그 도구의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어쨋거나 안희정씨에게 그가 한 이 말,
“...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그러니까 개체로써의 인간은 안 바뀐다는 거야. 그런데도 인류는 진보한다는 것이 신기한 것 아니냐.”
여기에는 다음의 두 가지의 명제가 있습니다.
1. 사람은 안 변한다.
2. 인류는 진보한다.
모아서 보면,
"인간 개체는 변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전체 인류는 진보(변)한다"
그래서 그는 신기하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기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살 버릇은 여든까지 간다거나
인류가 진보한다는 것은
그들의 먹을거리나 생활의 편리성이 나아졌다는 점에서
진보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쨋든 이러한 명제가 참이다, 거짓이다,
현실적인 근거를 대거나 논리를 세우는 일은
외계의 존재에 대한 논의만큼이나 제게는 허망한 일입니다.
때문에 그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인간이나 인류가 변한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보고 판단하는 하나의 멘탈 모델을 나타낼 뿐이지만,
인간은 '변화를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점에는 동감합니다.
단, 여기서 변화는 인간 '개체가 스스로'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개체 자신의 의지나 이해가 아닌
타력에 의한 변화는
겉으로 드러나는 일부 행동만이 그러하거나,
남의 눈을 의식한 일시적인 변화에 그치게 됩니다.
설사,
그것이 근본적인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즉, 자신은 변하지 않은 채
남만 변하기를 다그치는 폭력을 난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변화는 스스로의 이해에 의한 변화만이
근원적이고 또한 영구히 유지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깨어날 수 있도록 도울뿐입니다.
변화는 스스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자신마저도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변화는 거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결과일뿐입니다.
자신을 (억지로) 변화'시키는' 일..,
그래서 나타나는 결과는 일시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결국,
세살 버릇을 여든까지 가져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의 경험들은
'스스로의 이해'를 위한 소재들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고 이해하기 위해 늘 깨어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경험들에서
우리는 무엇을 이해하는가, 이해해야 하는가?
민주, 정의, 자유, 평등, 평화...
자신이 성스럽게 휘두르고 있는 그러한 관념들,
너무 성스럽게 여기다보니 자신마저도 휘둘리고 있는
자신이 가진 관념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그러한 관념들을
자신도 모르게
자기 중심적으로 휘두르고, 또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010.07.30.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 대통령 노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