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午(선조15년, 1582) 임금의 명을 받들어 지어 올림
신이 고찰하건대, 천리(天理)가 사람에게 부여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과 기(氣)를 합하여 한 몸에서 주재(主宰)가 되는 것을 심(心)이라 하고, 심이 사물에 응해서 밖으로 발하는 것을 정(情)이라 하는 것이니, 성은 심의 체(體)이고 정은 심의 용(用)인데, 심은 아직 발하지 않은 것과 이미 발한 것의 총칭이므로, 심이 성과 정을 통관(統管)한다고 한다.
성에는 다섯 조목이 있는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며, 정에는 일곱가지가 있는데,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이다.
정이 발할 때에 도의(道義)를 위해서 발하는 것이 있는데 어버이에게 효도하려 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려 하고, 어린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측은히 여기고,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미워하고, 종묘(宗廟)를 지날 때에는 공경하게 되는 것들이 그것이니, 곧 도심(道心)이라는 것이다.
정이 발할 때에 입이나 몸 따위를 위해서 발하는 것이 있는데, 배고프면 먹으려 하고, 추우면 입으려 하고, 힘들고 괴로우면 쉬려 하고, 정(精)이 성해지면 여자를 생각하는 것들이 그것이니, 곧 인심(人心)이라는 것이다.
이(理)와 기(氣)는 함께 하나로 되어 있어서 본로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니, 심이 발동하여 정이 될 때에 발하는 것은 기(氣)이고, 발하게 하는 것은 이(理)이다.
기가 아니면 발할 능력이 없고, 이가 아니면 발하게 할 기인(基因)이 없을 터이니 어찌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이 다르랴{理發 氣發은 李退溪의 說로 이가 발하는 것 곧 사단(四端), 기가 발하는 것 곧 칠정(七情)임}.
다만 도심도 기에서 떠나지 못하나 그 발하는 것이 도의를 위한 것이므로 성명(性命; 하늘이 부여한 것을 命, 부여받아 나에게 있는 것을 性이라고 함)에 속하고, 인심도 이(理)이므로 형기(形氣)에 속한다.
마음의 본디 자리에서는 처음부터 두 가지 마음이 없는 것인데, 다만 발하는 곳에 곧 두 꼬투리가 있다.
그러므로 도심을 발하는 것도 기(氣)이나 성명에 의하지 않고서는 도심이 생기지 못하고 인심의 근원이 되는 것도 이(理)이지만 형기에 의하지 않고서는 인심이 생기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이 혹원혹생(或原或生)하며 공과 사로 달라지는 까닭이다{이것은 '혹은 성명의 바름에 기인하고, 혹은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생긴다'라는 주자(朱子)의 說로 인증(引證)한 것임}.
도심은 순연한 천리이므로 선(善)만이 있고 악이 없으며, 인심은 천리도 있고 인욕(人欲)도 있으므로 선도 있고 악도 있는데, 예를 들자면, 마땅히 먹을 만한 경우에 먹고 마땅히 입어야 할 경우에 입는 것은 성현도 이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은 천리이며, 먹는 것과 여색 때문에 빗나가서 악하게 된다면 이것이 인욕이다.
도심은 간직하여 지켜야 할 따름이거니와, 인심은 인욕으로 빗나가기 쉬우므로 그것이 비록 선하더라도 역시 위태로우니, 마음의 공부를 하는 사람은 한 생각을 발할 때에 그것이 도심인 줄 알면 곧 확충하고 인심인 줄 알면 곧 정밀히 살펴서 반드시 도심으로 절제(節制)하여 인심이 늘 도심의 명령을 받아들이도록 하면 인심도 도심이 될 것이니 누가 이(理)를 간직하지 못할 것이며 누가 욕(欲)을 막지 못하랴.
진서산(眞西山; 1178~1235; 名은 德秀, 西山은 號, 南宋의 學者, 政治家)이 지극히 분명하게 천리·인욕을 논하여 학자들의 공부에 매우 유익하기는 하나 인심을 인욕으로만 돌려서 그것을 극복하기만 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철저하지 못한 말이다.
주자(朱子)의 말에 "비록 상등 가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인심이 없을 수는 없다"라고 하였으니, 성인도 역시 인심이 있는데, 어찌 모두가 인욕이라고 할 수 있으랴.
이것으로 본다면, 칠정(七情)이란 것은 곧 인심과 도심·선과 악의 총칭이다. 맹자(孟子)는 칠정 중에서 선한 한 편만을 따내서 사단(四端)이라고 이름지었으니, 사단은 곧 도심 및 인심의 선한 부분이다.
사단(四端)에 신(信)을 넣지 않은 것을 정자(程子)가 해설하여, "성심으로 사단하면 곧 신은 그 가운데에 있다"고 하였다.
사단은 도심이고 칠정은 인심이라고 논하는 사람도 있으나, 사단은 도심이라 하겠지만, 칠정이 어찌 인심이라고만 하랴.
칠정 이외에는 다른 정이 없는데, 만일 칠정을 인심만으로 돌린다면, 이것은 반(인심을 가리킴)만 들고 반(도심을 가리킴)은 빼어 놓은 것이 된다.
자사(子思)는 "중용(中庸)"에서 성정의 완전한 덕을 논하면서 칠정만을 들어서 칠정이 아직 발하기 전이 중(中)이고, 이미 발한 것이 절도에 맞는 것이 화(和)라고 하였으니 이는 어찌 칠정을 인심만으로 생각하였겠는가.
그것은 명백하여 의심이 없거니와, 곧 성이 마음에 갖추어서 발하여 정이 되는 것이니, 성이 본디 선한 것이므로 정도 역시 선하지 않은 것이 없어야 할 터인데, 정은 정하지 못하기도 하다.
어째서이냐 하면 이는 본디 순연히 선하기만 한 것이나, 기에는 맑음과 흐림이 있으며, 기는 이를 담는 그릇인데 발하기 전에는 기가 작용하지 않으므로 중체(中體)가 순연히 선하기만 하나 발할 때에 선·악이 비로소 나뉘니 선은 맑은 기가 발한 것이고, 악은 흐린 기가 발한 것인데 그 근본은 모두 천리일 뿐이다.
정의 선한 것은 맑고 밝은 기를 타고 천리에 따라 곧 바로 나와서 중을 잃지 않아,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단(端)이 되므로 사단이라고 부른다.
정하지 않은 것은 비록 이(理)에 근원하였으나 이미 더럽고 흐린 기에 가리워서 그 본체를 잃고 빗나가 생겨나서 지나치기도 하고 모자라기도 하여 예(禮)를 해치고 지(智)에 근본을 두었으면서도 도리어 지를 해치므로 단이라고 하지 못한다.
주자(周子)가 "오성(五性; 喜怒欲懼憂, 또 五臟에 붙여 다섯 가지로 나누기도 함)이 감동하여 선·악으로 나눈다"고 하였고, 정자가 "선·악이 다 천리이다"라고 하였고, 주자(朱子)가 "천리로 말미암아 인욕도 있다" 하였으니, 다 이것을 말한 것이다.
금세의 학자들은 선·악이 기의 맑음과 흐린 것에 기인하는 줄 모르고 그 설(說)을 찾아 얻지 못하였으므로 그저 이(理)가 발하는 것이 선이고 기가 발하는 것이 악이라고 생각하여, 이·기가 서로 떨어질 수 있는 것으로 하는 과실을 범하니, 이것은 곧 밝지 못한 이론이다. 신(臣)이 어리석어 어울리지 않음을 헤아리지 않고 다음과 같은 그림을 만든다.
p.374 [그림] 생략
내가 계응(季鷹)에게 말하였다. "대저 '기질성(氣質性)'도 '본연성(本然性)'이 아닌 별다른 성이 아니다. 기질의 본연성을 포함하고서 날 때에 함께 났으므로 기질도 성이라 한다. 기질은 그릇과 같고 성은 물과 같아서 맑은 그릇에 물을 담은 것은 성인이고 그릇에 모래나 흙이 있는 것은 중등 인물이고, 아주 진흙 속에 물이 섞여 있는 것은 하등 인물이다. 새·짐승들도 물(성을 가리킴)이 없는 것은 아니나, 물과 흙이 섞여 만들어진 흙덩이 같아서 다시는 맑아질 수 없는 것이니, 습성(濕性)이 이미 말랐으므로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주자(朱子)의 말에 '정은 성의 용(用)이고, 성은 정의 체(體)이고, 심(心)은 성·정의 주(主)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도 역시 기질을 포함하여 말한 것이다."
내가 강릉(江陵)에 있을 때에 기명언(奇明彦; 중종 22(1527)~선조5(1572) 名은 大升, 明彦은 그의 字)이 퇴계(退溪)와 四端·七情을 논한 편지를 보았는데, 퇴계는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고 하고, 명언은 '사단과 칠정이 본디 두 가지가 아니라, 칠정 중의 이에서 발한 것이 사단이다'라고 하여 나는 명언의 말이 나의 의견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대개 성에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있고, 정에는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이 있는데, 이 5 상(常) 밖에 다른 성이 없고, 칠정 밖에 다른 정이 없다. 칠정이 발할 때에 인욕(人欲)을 섞지 않고 순수히 천리에서 나온 것이 사단이다.
을축(乙丑; 명종 20년 1565) 정월 초하루에 내가 강릉부사(江陵府使) 김문길(金文吉; 중종 20(1525)~선조16(1583), 名은 添慶, 文吉은 그의 字)과 '측은의 정(惻隱之情)을 얘기하였는데, 김이 "사단은 중절(中節; 규범에 맞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하므로 내가 말했다.
"사단은 정이 이미 발동한 것인데, 어찌 중절한 것에도 중절하지 않은 것에도 속하지 않는 정이 있는가"
김이 묻기를 "그러면 도둑이 사형되는 것을 보면 측은한 정이 일어나는데 이것도 중절의 정인가." 라고 하므로 내가 답하였다.
"도둑의 죄는 죄대로 미워하면서도 죽게 되는 것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곧 천지가 만물을 낳은 마음이니, 어찌 중절이 아닌가."
내가 말하였다.
"정추만(鄭秋巒; 중종4(1509)~명종16(1561), 名은 之雲, 秋巒은 그의 號)의 '천명도(天命圖)'에 사단을 아래에 그리고 의(意) 자를 위에 그렸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학자들은 실행을 힘써야지, 천명을 졸연히 말하여서는 안된다.
pp. 375-376
자고(子固)가 나에게 들려 조용히 심·성·정을 이야기 하다가 내가 물었다.
"그대가 세 가지를 하나하나 이해할 수 있는가."
"선유(先儒)의 말에 '성이 발하여 정이 되고, 심이 발하여 의(意)가 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므로, 내가 말했다.
"그대가 이 말에 의심을 가진다면, 심·성·정을 알기는 쉬울 것이다. 선유의 말은, 다른 까닭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지, 바로 심성을 논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금세의 학자들이 이 말을 그릇되게 믿어서, 심과 성에 두 작용이 있고 정과 의가 두 가지인 줄로 생각하니, 내가 매우 괴롭다.
이제 그대가 스스로 여기에 의심이 간다고 하였으니 참되게 알기를 바랄 뿐이다.
성은 심의 이(理)이고, 정(情)은 심의 동(動)이고, 정이 발동한 뒤에 정으로 말미암아 헤아리게 되는 것이 의(意)이다. 만일 심과 성이 두 가지의 것이라면 도(道; 原理 곧 形而上)와 기(器; 事物 곧 形而下)가 서로 떠날 수도 있을 것이며, 정과 의가 두 가지의 것이라면, 사람의 마음에 두 근원이 있다는 것이니 어찌 그릇된 이론이 아닌가.
성·심·정·의가 다같이 한 길이면서, 저마다 경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왜 한길라고 하느냐 하면, 심이 발하기 전은 성이고, 이미 발한 것은 정이고, 정이 발한 뒤에 헤아리는 것이 의이니, 이것이 한 길이 아니겠는가.
왜 저마다 경계가 있다고 하느냐 하면, 마음이 고요히 움직이지 않을 때는 성(性)의 경계이고, 마음이 감촉하여 통할 때는 정(情)의 경계이고, 감촉된 것으로 말미암아 해석하고 헤아리는 것은 의(意)의 경계이니, 같은 하나의 마음으로서 이런 여러 가지 경계가 있는 것이다."
김장생(金長生; 명종3(1548)~인조9(1631), 號는 沙溪, 栗谷의 제자)과 이배달(李培達)이 "부모가 자애(慈愛)하고, 자식이 효도하는 것은 떳떳한 이치인데, 어째서 자애하는 사람은 많아도 효도하는 사람은 적으며, 동물은 다 새끼를 사랑할 줄 알면서도 어미에게 효도할 줄 모르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묻기에, 내가 답하였다.
"이(理)로 말하자면 말단이 근본을 귀중히 여기고, 기(氣)로 말하자면 낡은 것이 새것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므로, 기는 쉬지 않고 낳고 낳아, 그전 것은 지나가고 오는 것이 계속된다. 이치에 밝은 사람은 근본을 귀중히 여겨서 어버이를 사랑하고, 기가 하는 대로 맡겨 두는 자는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고 자식만 사랑하거니와, 대개 이러하니, 다만 스스로 궁구하여 깨닫기에 달렸다."
pp.501-502 율곡집 해설(성낙훈) 발췌
사단(四端)이란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이고, 칠정(七情)이란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을 가리키는데, 주자(朱子)와 이황은 사단이 이(理)에서 나오고 칠정이 기(氣)의 시작이라 하여 둘로 나눈 데 반해, 이이는 칠정 속에 사단이 포함된 것으로 보는 혁신적인 이론을 전개했다. 이 유명한 논변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심(心)은 하나인데, 도심(道心)이니 인심(人心)이니 하는 것은 성명(性命-道心)과 형기(形氣-人心)의 구별이요, 정(情)은 하나인데 사단이니 칠정이니 하는 것은 전혀 이(理)만 말한 것{사단(四端)}과 기(氣)를 겸하여 말한 것{칠정(七情)}의 구별이다. 사단은 칠정 중에서 그 선(善)한 일변(一邊)만을 택하여 말한 것이니, 인심과 도심의 상대적으로 말한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지금 양변(兩邊)으로 상대하여 말하고자 하면 마땅히 인심도심의 설을 따를 것이요, 선한 일변만을 말하고자 하면 마땅히 사단의 설을 따를 것이요, 선악을 겸하여 말하고자 하면 마땅히 칠정의 설을 따를 것이다. 사단은 칠정을 겸하지 못하고 칠정은 사단을 겸한 것이니, 주자의 이른바 사단은 '이에서 발(發)하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한다' 한 말은 다만 대강(大綱)으로 말한 것인데, 어지 후인(後人)이 너무 심하게 나눌 줄 알았으랴.
퇴계(退溪) 선생의 말대로 한다면 칠정 밖에 따로 사단이라는 선정(善情)이 있다는 말인가. 이 선정은 칠정이 아닌 어디서 발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 2본(二本)이 있는 것이니 그럴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이이(李珥)·성혼(成渾) 간의 변론은, 조금 먼저 전개된 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 간의 변론과 함께 후세의 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중대한 변론으로 높이 평가되어 온다.
이이(李珥), "인심도심도설(人心道心圖說)", 『한국(韓國)의 사상 대전집(思想 大全集) 12』, 동화출판사, p.372 - 373.
성낙훈, "율곡집 해설", 『한국(韓國)의 사상 대전집(思想 大全集) 12』, 동화출판사, p.501 - 502.
마음이 발(發)하기 전, 후의 경계: 심(心)·성(性)·정(情)·의(意)
마음이 발(發)하게 하는 기인(基因)은 이(理), 발하는 것은 기(氣)
기(氣)의 맑음과 흐림에 따라 선(天理)·악(人欲)이 나뉨
- 사단(四端):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
- 칠정(七情):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
2010.05.22. 오죽헌을 방문하였다가
2010.06.03. 정리해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