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 鶴峯 金誠一 종택
From: NAVER 지식iN
Written by: joba34, 2005.08.13 17:33
人傑地靈의 명당, 선비정신의 산실
의성김씨 종택은 권력의 부조리를 정면에서 고발하는 기백과 목숨을 내건 의리로 인해 조선시대 금부도사가 세 번이나 체포영장을 들고 오는 수난을 겪었다. 또 비범한 인물들을 배출한 내앞 종택의 산실(産室)은 이문열의 소설 소재로 등장할 만큼 이야깃거리가 풍부하다.
조용헌 <원광대 사회교육원 교수>
안동에 있는 의성김씨(義城金氏) 종택을 찾아간다. 안동 시내에서 동쪽으로 반변천(半邊川)을 따라 30리를 올라가다 보면 국도 연변 좌측에 고풍어린 기와집들이 즐비하게 자리잡은 풍경이 나타난다. 바로 5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의성김씨 집성촌이다.
그 기와집들 가운데에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년)을 중시조로 모시는 의성김씨 내앞(川前) 종택이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내앞 종택은 조선 선비의 강렬한 정신이 어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강렬함이란 권력의 부조리를 정면에서 고발하는 직언(直言) 정신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기백을 가리킨다.
내앞 종택은 그 기백과 의리 때문에 조선시대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직접 체포영장을 들고 찾아와 종택 뜰에 말을 매는 일대 사건을 세 번이나 겪어야 했다. 안동지역 인근에서 회자되는 ‘유가(儒家)에는 3년마다 금부도사가 드나들어야 하고, 갯밭에는 3년마다 강물이 드나들어야 한다’는 속담은, 자신의 신념과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금부도사의 체포영장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광으로 받아들였던 조선 선비들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언제부터인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를 과도하게 명심한 나머지 자나깨나 모나지 않기 위해서 박박 기는 삶을 전부로 알고 있는 범부들의 처세 요령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차원이 다른 처세이자 정신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내앞 종택은 조선 선비의 기개가 전해오는 집이다.
의성김씨 내앞 종택에 전해오는 선비정신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안동문화의 특징을 간단하게 짚어보는 것이 순서일 성싶다.
명문 종택의 고장
한국의 문화지도에서 안동이라는 지방을 찾아보면 ‘양반문화’라는 코드가 나타난다. 다른 지역에 비해 조선시대 양반 선비들의 문화가 현재까지도 가장 잘 보존된 지역이 안동 일대다.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인지는 몰라도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의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 안동이다. 문중 제사가 있으면 전국에서 모여들고, 외부 손님이 왔을 때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 맞이하는 고풍을 간직하고 있다. 필자는 ‘전라도 사람’으로서 수년 동안 안동 일대를 여러 차례 답사했는데, 그때마다 안내를 맡은 청년유도회(靑年儒道會)의 정성어린 접대를 받으면서 접빈객의 유풍(遺風)이 살아 있음을 실감한 바 있다.v 그런가 하면 종가에 대한 애착도 각별한 것 같다. 종손의 자녀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대학 등록금을 내지 못하면 지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갹출해서 대신 내주는가 하면, 종가의 건물을 보수하고 선조들의 문집을 번역 출판하는 이른바 ‘보종(補宗)’에도 아주 열심이다. 전국적으로 볼 때 조선시대 선비들의 문집 간행이 가장 활발한 곳 역시 이곳이다.
수백년 역사를 지닌 종택들이 가장 많이 보존되고 있는 곳도 안동 일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의성김씨, 진성이씨, 안동권씨, 고성이씨, 하회류씨, 전주유씨, 재령이씨, 광산김씨 등등 명문종택 수십 군데가 안동, 봉화, 영양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종택이 안동 일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일대에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 36년의 굴욕, 6·25전쟁의 겁살, 산업화로 인한 인구의 대도시 집중, 그리고 유교의 봉제사가 광복 이후 전파된 기독교의 반제사(反祭祀)와 정면으로 문화적 충돌을 겪는 과정에 유교적 풍습과 그를 뒷받침하던 종택(종가)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와해돼 왔다.
그러한 역사의 풍파를 겪으면서도 유독 안동 일대만큼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유교문화의 순도를 유지하고 있다.
왜 그런가? 오늘날 안동 일대에 유교문화 또는 양반문화가 비교적 많이 보존돼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안동 내앞의 의성김씨 종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풍수가에서 지목하는 영남의 4대 길지는 경주의 양동마을(良佐洞), 풍산의 하회(河回), 임하(臨河)의 내앞, 내성(乃城)의 닭실(酉谷)을 꼽는다. 양동마을은 건축학자 김봉렬의 표현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평창동에 해당되는 고급주택지로서 손중돈과 이언적의 후손들이 사는 곳이다. 하회는 겸암과 서애로 상징되는 류씨들 동네고, 내앞은 의성김씨, 닭실은 충재의 고택으로 뜰 옆 거북바위 위에 앉아 있는 청암정(靑巖亭)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4대 길지 가운데서 양동마을을 제외한 세 군데, 즉 하회·내앞·닭실이 안동 부근에 몰려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택리지’의 4대 길지
그런가 하면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년)은 조선에서 양반선비가 살 만한 가장 이상적인 장소로 경북 예안(禮安)의 퇴계 도산서원이 있는 도산(陶山)·하회·내앞·닭실을 꼽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 풍수가에서 꼽는 영남의 4대 길지와, ‘택리지’에서 지목한 4대 길지 가운데 세 군데가 중복된다는 점이다. 하회·내앞·닭실이 그렇다. 이중환은 경주의 양동마을 대신 퇴계가 살던 도산을 포함시킴으로써 안동 일대 네 군데를 모두 조선의 베스트 명당으로 꼽은 것이다.
이중환은 어떤 기준으로 안동 일대를 선비의 가거지(可居地)로 본 것일까? 여기에는 이중환이 살던 당대의 정치 경제적 상황과 유교적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중환이 생각하였던 길지의 기준은 첫째 지리, 둘째 생리(生利), 셋째 인심(人心), 넷째 산수(山水) 네 가지였다. ‘택리지’에서 안동 일대를 선비가 살기에 최적지라고 지목한 이유는 이상 네 가지 조건에서 모두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조건을 필자의 소견으로 다시 한 번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리, 즉 풍수를 보자. 경상도는 충청과 호남에 비해서 전체적으로 산세가 높고 가파른 편이지만, 안동 일대만큼은 예외적으로 높지 않은 산들이 고만고만하게 포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위가 뾰족뾰족 돌출된 악산(惡山)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문사(文士)들이 좋아하는 온화하고 방정한 산세에 가깝다.
한반도 전체의 지맥을 놓고 보자면, 척추인 백두대간에서 부산 쪽으로 내려가는 낙동정맥과 태백산에서 방향을 틀어 속리산 쪽으로 내려가는 다른 한 맥의 분기점 중간에 안동 일대가 있다.
흔히 기공(氣功)이나 단전호흡, 쿤달리니 요가를 수련하는 방외일사(方外逸士)들 사이에 종종 화제에 오르는 ‘양백지간(兩白之間)’이 바로 이곳이다. 양백지간이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를 일컫는 표현으로, 크게 보면 안동 일대, 즉 봉화, 춘양, 안동, 영양 지역이 양백지간에 해당하는 곳이다.
흰 백(白)자가 들어가는 산들은 백의민족이 정신수련을 하기에 적합한 산이라고 일컬어지는데, 태백과 소백은 바로 그러한 신령한 산일 뿐 아니라 이 지역 일대가 현재까지 남한에서 가장 덜 오염된 지역이고 기운이 맑은 곳이라고 평가된다. 경상도가 충청이나 호남보다 먼저 공업화의 길을 걸었지만 주로 낙동강 중하류인 대구와 부산 쪽이 오염되었지, 낙동강 상류인 이곳 양백지간은 오지라서 공장도 거의 들어서지 않은 덕택에 현재도 비교적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둘째, 경제적 조건인 생리 부문이다. 조선시대의 가치관으로 볼 때 사대부가 장사를 하면서 재리(財利)를 취할 수는 없었고, 기껏 한다면 농사나 짓고 사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경상도의 산간지역보다는 호남의 넓은 평야지대가 농사짓기에 훨씬 유리할 것 같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 지리학자 최영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호남평야의 범위가 현재보다 훨씬 좁았으며, 바닷가의 들(갯땅)에는 소금기가 많고 관개시설의 혜택을 고르게 받지 못하여 한해와 염해를 자주 입는 곳이 많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들판보다는 약간 내륙 쪽의 고래실(구릉지와 계곡이 조화를 이룬 지역)에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하고 바닷가의 들에는 주로 가난한 농민이 거주하였다. … 기계화의 수준이 낮은 농경사회에서는 홍수의 피해가 크고 관개가 어려운 대하천보다 토양이 비옥하고 관개가 용이한 계거(溪居)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최영준, ‘국토와 민족생활사’, 84쪽)
조선시대에는 관개시설도 부족하고 염해가 발생하는 평야보다는 오히려 내륙의 냇물이 흐르는 곳이 농사짓기에 적합했다는 지적이다. 산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높은 산도 아니라서 적절한 구릉과 계곡이 이곳 저곳에 형성되어 있는 낙동강 상류지역은 바로 이러한 입지조건에 해당한다.
지형도에 나타난 지명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지명에 계곡을 나타내는 골(谷)이라는 접미어가 붙은 곳이 조선시대 안동부에 속하는 안동, 봉화에 각각 27%와 28%로 전국 최고 비율을 점하고 있으며, 골과 같은 의미인 ‘실’과 ‘일’을 더하면 35%, 32%로 역시 전국 평균 19%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정원진, ‘한국인의 환경지각에 관한 연구’, 1983)
경상도와 전라도 인심론
셋째, 인심을 보자. 오늘날까지도 인심은 매우 민감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이중환은 평안도, 경상도만 빼놓고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 인심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평안도는 인심이 순후하고 경상도는 풍속이 진실하지만, 나머지 지역은 인심이 사납거나 멍청하거나 간사한 지역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경상도 지역을 더욱 좁혀보면 안동 일대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이중환은 경상도와는 대조적으로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서는 ‘오로지 교활함을 좋아하고 나쁜 일에 쉽게 부화뇌동한다(專尙狡險 易動以非)’고 혹평하고 있다. 경상도를 진실하다고 본 것에 비하면 전라도에 대한 평가는 감정 섞인 것이 아닌가 생각될 만큼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안동 인심의 정반대 쪽에 전라도 인심이 놓여 있는 것이다.
왜 이중환은 이처럼 경상도와 전라도에 대조적인 평가를 내렸을까? 이중환은 팔도 가운데 평안도와 전라도만큼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가본 적이 없는데도 부정적으로 단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보학(譜學)의 대가인 송준호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지적을 하고 있다. 송교수에 따르면 이중환의 친외가는 바로 전라도 무장(茂長)이었다. 서울에서 살던 이중환의 부친 이진휴(李震休, 1657∼1710년)가 전라도 무장에서 명문가로 알려진 함양오씨(咸陽吳氏) 오상위(吳相胃, 1634∼1687년)의 사위가 되었던 것이다(송준호, ‘조선사회사연구’, 1987).
그런데 이중환이 자신의 외가동네이자 어머니 고향인 전라도에 대해서 이러한 평가를 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의외다.
또 한 가지 의문은 이중환이 60평생을 살면서 외가인 전라도에 한 번도 다녀간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풍습으로는 결혼을 해서 처가가 있는 지역(聘鄕)으로 옮겨가 사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중기까지 딸들도 재산을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친가가 아닌 외가에서 태어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린 시절 일정 시기는 외가에서 지내는 이가 많았다. 그런데 이중환은 평생 외가에 발을 붙인 적이 없다. 철저한 단절이 있었다. 이 점이 이상하다!
이중환이 경상도 인심을 높게 평가한 반면, 자신의 외가동네인 전라도 인심을 낮게 평가하게 된 이면에는 임진왜란 바로 전 해에 발생한, ‘조선시대의 광주사태’라 불리는 정여립(鄭汝立) 사건(己丑獄事, 1591년)을 읽어내야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사 책임자였던 송강 정철의 반대쪽 라인에 서 있던 전라도 선비 약 1000명이 쿠데타 혐의를 받고 죽거나 병신이 되었다. 주로 동인(東人)이자 나중에 남인(南人)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피해자였다. 이중환의 외가인 함양오씨 집안도 남인이었음은 물론이다.
오씨들은 이 사건으로 억울하게 당했다고 여겨지는 ‘호남오신(湖南五臣; 鄭介淸, 柳夢井, 曺大中, 李潑, 李)’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정철의 노론측(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후손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남인의 선봉대 집안이었다. 함양오씨를 비롯한 전라도 남인들과, 송강 정철을 추종하는 노론측은 기축옥사 이후로도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엎치락뒤치락 하는 공방전을 벌였다.
이걸 보면 경상도 남인보다 전라도 남인들이 훨씬 고생을 많이 하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경상도는 노론이 드물고 거의 퇴계 문하의 남인 일색이라 같은 색깔 아래에서 동지적 결속이 가능한 분위기였지만, 전라도는 노론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전라도 남인들은 아웃사이더로서 많은 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래서 전라도 남인들은 영남의 남인들을 부러워했다.
이중환의 외가인 함양오씨들이 참혹한 불행을 겪은 사건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영조 4년(1728)에 발생한 ‘이인좌의 난(戊申亂)’이다. 이 사건에 함양오씨, 나주나씨(羅州羅氏)를 비롯한 전라도 남인들이 상당수 관여했다는 노론측의 주장에 따라 오씨 집안은 사약을 받거나 장살을 당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이때가 이중환의 나이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었던만큼 그 사건의 전말과 전개 과정을 충분하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쟁의 와중에 외가가 이처럼 당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중환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철저한 환멸 그 자체 아니었을까! 아마 전라도 쪽은 쳐다보기도 싫었을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당쟁의 피해를 산출할 때 그 폭과 깊이에서 상대적으로 피해가 심했던 곳은 영남보다 호남지역이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래서 이중환은 외가이기는 하지만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인 전라도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던 것 같다.
아울러 그러한 내면세계가 반영된 평가가 ‘택리지’의 저술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 송교수의 견해다. 반대로 권력에서 소외되었을지언정 남인들끼리 오순도순 사이좋게 모여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는 경상도 안동 쪽의 풍경은, 당시 뜻을 펴지 못하고 방황하던 남인 신분의 이중환에게는 살 만한 곳으로 생각되지 않았겠는가. 인간은 결코 자기가 살던 당대의 역사적 현실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날 수 없으니까 말이다.
넷째는 산수를 보자. 동양화는 대부분 산수화다. 다른 주제는 별로 없다. 한자문화권의 식자층이 인생의 커다란 즐거움으로 생각한 것은 아름다운 산수에서 노니는 것이었고, 궁극적인 가치로 생각했던 것은 대자연과의 합일이었다. 산과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광달락(曠達樂)을 누리는 것, 우리 삶에서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까!
층층의 기암절벽 사이로 냇물이 많이 흐르는 안동 일대는 이러한 산수를 즐기기에는 최적지로 여겨진 것이다. 물론 다른 곳에도 기암절벽과 냇물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이곳은 조령을 통해 서울로 갈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으면서도 반면에 다른 쪽은 산으로 첩첩 둘러싸인 오지라서 조선시대 내내 서해안, 남해안, 그리고 동해안 남쪽에 이르기까지 시도때도 없이 출몰했던 왜구들의 침입에도 안전지대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전란이 적어서 많은 학자와 시인 그리고 도교의 방사(方士)들이 선호했던 중국의 오지 사천성(四川省)처럼, 한국의 양백지간(兩白之間)인 안동, 봉화 일대는 가장 병화(兵禍)가 적은 무릉도원이었다고 말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냇물가에서 살아가기
‘택리지’에서 이중환이 제시한 지리, 생리, 인심, 산수라는 네 가지 조건을 이상적으로 갖춘 곳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계거(溪居)’다. 계거란 냇가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바닷가 옆에서 사는 해거(海居)보다는 강 옆에서 사는 강거(江居)가 낫고, 강거보다는 냇가에서 사는 계거를 더 높게 쳤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계거를 이상적인 입지조건으로 인식하였다.
의성김씨 내앞 종택은 바로 그러한 계거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내앞’(川前)이란 이름도 반변천(半邊川)이라는 냇물 앞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이 집안의 중시조인 청계(靑溪) 김진의 호에 ‘계(溪)’자가 들어간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그런가 하면 내앞과 인근지역인 도산(陶山)에 살면서 청계와 거의 동년배였던 퇴계(退溪) 이황도 그 호에 역시 계자가 들어가 있다.
대략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중반까지의 시기에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명문거족의 집들이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내앞 종택은 경북 영양군에 위치한 일월산(日月山, 1219m)의 지맥(支脈)이 동남방으로 내려오다가 서쪽으로 흘러오는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과 만나면서 자리를 만든 곳이다. 반변천은 마을 앞을 휘돌아 나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모래밭을 형성하였다.
이름하여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 밝은 달 아래에서 귀한 사람이 입는 옷(紗)을 세탁하는(浣) 형국이란 뜻이다. 여기서 완사는 반변천의 맑은 모래밭을 상징하는 것 같다. 모래밭과 밝은 달, 추월양명휘(秋月揚明輝)라고 하였던가.
내앞 종택은 봄이나 여름보다는 가을밤에 둥그런 달이 떴을 때 부서지는 월광 속에서 바라보아야 완사명월의 아름다움을 알 것 같다. 종택 옆의 경포대(鏡浦臺)나 다추월(多秋月)이라는 지명은 가을달의 아름다움을 입증하고 있다. 강릉 경포대보다 가을 달이 더 많이 비친다고 해서 다추월이라고 이름을 붙였단다.
내앞 종택의 풍수지리적인 조건을 살펴보자. 이 집터를 자세히 보면 집 뒤 반달 모양의 입수맥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지 않고 왼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통상 입수맥의 가운데 센터에 집을 앉히는 것과는 다르다.
그 이유는 집 앞에 있던 조그만 연못에서 찾아야 한다. 지금은 메워져서 밭으로 변하고 말았지만 원래 이 연못은 풍수적으로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는 장치였다. 이 연못은 집터의 기운을 한곳으로 집중시켜 주는 기능도 하고, 밖의 외기와 안의 내기가 서로 교류하면서 집터의 기운을 순환시켜 주는 작용도 한다.
풍수에서는 터의 바로 앞에 위치한 연못이나 샘, 또는 방죽을 혈구(穴口)라고 부른다. 혈구란 혈자리의 입구이자 입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혈구가 있어야 집터의 기운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지 않고, 음기와 양기가 서로 들락거리면서 집터 안에 생기를 유지한다. 인체에 비유하여 설명하면 집터가 코 끝에 자리잡는다고 하면, 혈구는 입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터와 혈구는 일직선상에 놓여 있어야 법식에 맞다. 즉 얼굴의 코와 입이 제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만약 집터와 혈구가 대각선이 되거나 또는 각도가 어긋나서 비뚜름하게 있으면 그 집터는 풍수의 법식에 맞지 않다고 간주한다. 바꾸어 말하면 애시당초 터를 잡을 때 혈구와 일직선상에 맞추어서 터를 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내앞 종택을 보면 집터를 잡을 때 이 연못과 집의 대문이 거의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방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혈구의 방향에 직선으로 일치하는 곳에 집터를 잡다 보니까 입수맥의 좌측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혈구와 일치하지 않은 집터일 경우는 그 효과가 반감된다고 본다. 또 명당에는 반드시 혈구가 코앞에 있고, 혈구가 없다면 그 터는 A급 명당은 못 된다. 터는 좋은데 혈구가 없어서 인위적으로라도 땅을 파서 만들어 놓은 사례도 많은데, 묘터나 집터 앞에 인공적으로 방죽을 조성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내앞 종택의 터는 대문 앞쪽으로 30m쯤 떨어져 있던 이 혈구(연못)가 명물이라서, 풍수가에서는 ‘의성김씨 종택에 가거들랑 혈구 먼저 보아야 한다’는 말이 전해져왔다. 그러나 몇 년 전에 필자가 처음 이곳에 답사를 와서 혈구를 확인하려 해도 찾을 수 없었다. 이번 답사에서 안내를 해준 김종선(金鍾善)씨는 옛날에는 이 연못에서 낚시질도 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60년대 중반 흙으로 메워 밭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현재 도로 옆에 보이는 밭이 그것인 모양이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한숨이 나왔다. 지금이라도 연못을 원상복구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풍수서에 기록된 바로는 양택 앞에 연못으로 된 혈구가 있으면 ‘삼원불패지지(三元不敗之地)’의 명당이라고 일컫는다. 1원(元)은 60년이므로 180년 동안 패하지 않고 오래가는 명당이라는 뜻이다.
종택의 비보 풍수
의성김씨 내앞 종택의 풍수적인 여러 조건은 별로 흠잡을 것이 없으나, 한 가지 수구(水口)가 너무 넓게 터져 있다는 점이 거슬린다. 수구는 좌청룡, 우백호의 사이의 벌어진 공간으로 통상 이 공간을 통해 출입하는 물의 통로를 가리킨다. 이것이 너무 넓으면 마을이나 집터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으로 간주한다. 수구가 엉성하고 열려 있으면 비록 좋은 밭 만 이랑과 넓은 집 천 칸이 있다 하더라도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수구가 꼭 닫힌 듯하고, 그 안에 들이 펼쳐진 곳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고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주장한다.
내앞 종택은 수구가 터진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수구막이를 조성하였다. 비보(裨補)를 한 것이다. 자연에 인위를 가하여 생기를 부과한 것이 바로 비보다.
이른바 ‘개호송(開湖松)’이라고 불리는 소나무 숲이 바로 그러한 비보풍수의 전형적인 사례다. 내앞 동네에서 700m 정도 서쪽으로 떨어진 반변천 가운데 모래밭에 인위적으로 소나무 숲을 조성해 놓은 것이다. 동네의 기운이 무차별적으로 빠지는 것을 이 소나무 숲이 막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성김씨들은 이 수구막이 소나무 숲을 유지하기 위하여 수백년 동안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문중 차원에서 특별 보호를 한 것이다.
경상대학교 김덕현(金德鉉) 교수는 내앞 출신인데, 그는 ‘전통촌락의 동수(洞藪)에 관한 연구-안동 내앞 마을의 개호송을 중심으로-(1986)’라는 논문을 통해 이 개호송의 조성과정과 인문지리적인 기능을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개호송은 청계의 조부인 김만근(1446∼1500년)이 처음 심었다. 그 후 홍수에 유실된 것을 1615년경 후손 김용(金湧)이 동네사람들과 함께 1000여 주를 다시 심고 선조의 뜻을 계승하여 보호하는 의미에서 별도의 글을 지어 다짐하기도 했다. 그 후에 사람들이 함부로 소나무를 베어가는 일이 발생하자 의성김씨들은 완의(完議)를 만들어 보호를 천명하고 수호방법을 구체적으로 정하였다.
그 보호문건이 ‘개호종송금호의서(開湖種松禁護議序, 1615년)’ ‘동중추완의(洞中追完議, 1737년)’ ‘개호금송완의(開湖禁松完議, 1757년)’다. 내용을 보면 마을 수구를 비보함으로써 가문의 터전과 가묘를 보호하기 위하여 개호송을 심었다, 따라서 선조를 높이고 종가를 소중히 생각하는 자는 선조의 사당과 종가가 있는 내앞(川前)을 지키는 이 소나무를 보호하는데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차송무천전(無此松無川前, 이 소나무가 없으면 내앞 마을도 존재할 수 없다)’이라는 표현이 개호송의 가치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의성김씨들이 문중의 사활을 걸고 보호한 덕분에 현재 반변천 가운데 모래밭에는 오래된 소나무 숲이 존재하는 것이다.
개호송은 수구막이라는 풍수 원리에 따라 조성된 것이지만 오로지 풍수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효과도 있다.
김덕현 교수의 주장으로는 그 효과는 외부의 관찰자는 느낄 수가 없고 오직 내부의 거주자만이 느낄 수 있는 심리적인 안정감, 즉 장소 안에 있다(insider)는 안정감이라고 한다. 개호송에 의해 마을이라는 장소는 ‘외부’와 대조적인 ‘내부’로 체험되는 것이다. 고향을 떠나 있던 사람이 고향에 돌아오면서 바라보는 개호송은 ‘저기서부터 우리 고향이다’고 말할 수 있는 충만감을 준다는 것이다.
사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한국인 대다수의 거주공간은 도시의 아파트라는 조막만한 공간으로 축소되어버렸다. 아파트에서 거주의 즐거움을 느끼겠는가? 불과 20∼30년 사이에 한국인의 절반 가량이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의식주 세 가지 가운데 주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쾌감을 상실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돌아갈 고향마저 동시에 사라져버렸다. 깊은 행복감이란 자기가 출발했던 근원으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끝없이 나아가는 것이 결국은 자기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 아닐까. 음양분화 전(陰陽分化前)의 고향산천 정기로 되돌아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할 때, 고향을 상실했다는 것은 크나큰 상처가 아닐 수 없다.
오룡지가(五龍之家)의 명문
내앞 의성김씨들이 명문가로 알려진 계기는 중시조인 청계의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면서부터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이다. 일제 강점기에 촌산지순(村山智順)이 지은 ‘조선(朝鮮)의 풍수(風水)’에도 명택의 사례로 완사명월형에 자리잡은 오자등과택이 소개되고 있다. 다섯 아들을 오룡(五龍)에 비유해서 오룡지가(五龍之家)라 칭하기도 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보면 아들 다섯 명이 과거에 합격하면 국가가 혜택을 주었다. ‘아들 다섯이 과거에 오른 부모에게는 임금한테 보고하여 해마다 쌀을 보내 주었으며, 부모가 죽으면 벼슬을 추증하고 제사를 지내준다’는 예전(禮典)의 조항이 그것이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한 것도 드문 일이지만, 그 다섯 아들 모두가 학행이 뛰어난 선비로서 각각 일가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더 중요하다.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1522∼1585년), 구암(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년), 운암(雲岩) 김명일(金明一, 1534∼1570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 1541∼1591년)이 바로 그들이다. 장남인 약봉은 내앞의 대종택에서 살았지만, 나머지 네 아들은 안동 인근으로 분가하여 각기 소종택을 형성하였다. 이 소종택들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버지인 청계의 교육방법이다. 어떻게 교육했기에 아들 다섯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켰을 뿐만 아니라,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강직한 선비로 키울 수 있었을까? 그 교육철학은 무엇이었는가?
청계가 자신의 성취보다는 자녀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 일화가 전해진다.
청계가 젊은 시절 서울 교외의 사자암에서 대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어떤 관상가를 만났는데 하는 말이 “살아서 참판(參判)이 되는 것보다는 증판서(贈判書)가 후일을 위해 유리할 것”이라는 충고였다. 이 말을 듣고 즉각 대과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녀교육에 전념하였다는 일화가 문중에 전해진다. 청계가 자녀교육에 관하여 유별나게 관심을 기울인 특별한 아버지였다는 것은 자식들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넷째 아들 학봉이 작성한 아버지 행장에는 가슴 뭉클한 내용이 나온다.
“큰형이 과거에 급제하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자녀가 모두 8남매나 되었는데, 대부분 어린아이거나 강보 속에 있었다. 이에 아버지께서 온갖 고생을 다해 기르면서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한밤중에 양쪽으로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있으면 어린아이가 어미젖을 찾는데 그 소리가 아주 애처로웠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젖을 물려주었는데, 비록 젖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젖꼭지를 빨면서 울음을 그쳤다. 아버지께서 이 일을 말씀하실 적마다 좌우에서 듣는 사람 중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린 새끼들이 밤에 젖을 찾으니 중년 남자인 자신의 젖을 물릴 정도로 자녀양육에 온갖 정성을 기울인 인물이 청계다. 그는 인근에 살던 퇴계에게 다섯 아들을 보내 공부시킨다. 다섯 아들은 일찍부터 퇴계의 훈도를 받은 것이다. 그중 넷째 아들인 학봉은 후일 서애 유성룡과 함께 영남학파를 이끄는 양대 기둥으로 성장한다.
청계가 자녀교육에서 강조했던 부분이 있다. 교육철학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영수옥쇄(寧須玉碎) 불의와전(不宜瓦全)’의 가르침이다. ‘차라리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차라리 곧은 도리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도리를 굽혀서 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런가 하면 평소에도 ‘너희가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오히려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줄 것이고, 소인이 되어 산다면 나는 오히려 죽은 사람과 같이 볼 것이다(人寧直道以死 不可枉道以生 汝等爲君子而死 則吾視猶生也 爲小人而生 則吾視猶死也)’고 강조하였다.
직도(直道)를 위해서라면 과감하게 목숨을 버리라는 가르침, 선비 집안에는 3년에 한 번씩 금부도사가 찾아올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각오, 이것이 조선조 선비정신의 정수가 아닌가 싶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회 중에 미꾸라지 회가 제일이다’는 자기 보존의 남루한 처세요령을 가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요즘 세태와 비교해보면 너무나 눈부신 철학이 아닐 수 없다.
임금에 직언하는 강직한 성품
넷째 아들인 학봉 김성일의 강직한 일화가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진다. 1573년 9월 학봉이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선조가 경연장에서 “경들은 나를 전대(前代)의 어느 임금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정언 정이주가 “요순 같은 분이십니다”라고 대답했더니, 학봉이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桀紂)도 될 수 있습니다”라고 응답했다. 임금이 “요순과 걸주가 이와 같이 비슷한가?”라고 물으니 학봉이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가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타고난 자품이 고명하시니 요순 같은 성군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간언(諫言)을 거절하는 병통이 있으시니 이것은 걸주가 망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주상이 얼굴빛을 바꾸고 고쳐 앉았으며 경연에 있던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서애 유성룡이 나아가 아뢰기를 “두 사람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이라고 응답한 것은 임금을 인도하는 말이고 걸주에 비유한 것은 경계하는 말이니,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도 얼굴빛을 고치고 신하들에게 술을 내게 하고서 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보통 직장생활에서 윗사람이 듣기 거북한 직언을 하고 나면, 그 후유증이 최소 3년은 계속되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런데 학봉은 임금 면전에다 대놓고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직언을 거절하는 병통이 있다”는 직언을 할 정도로 기백이 있었다. 학봉의 그 기백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는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 청계의 평소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학봉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풍신수길을 평하여 “그 눈이 쥐와 같으니 두려워할 것 없다”라고 했던 말이 임진왜란 상황을 오판하게 했다고 하여 체포령이 내렸다. 학봉은 그 소식을 듣자 금부도사를 기다릴 것도 없이 서울로 자진출두하였다. 출두하던 도중 충청도 직산에서 경상도초유사를 임명받고 영남으로 돌아와 왜군과 싸우게 되었다.
학봉이 진주성에 도착하니 목사와 주민이 모두 달아나 성은 텅텅 비어 심난한 상황이었다. 옆에 있던 송암(松庵), 대소헌(大笑軒) 두 사람이 산하를 쳐다보고 비통해하면서 강에 빠져 죽자고 하자 공은 웃으면서 사나이가 한번 죽는 것은 어려울 바 없으나 도사(徒死)해서야 되겠느냐 하면서 이때의 비장한 심정을 시로 읊었다. 이 시가 식자층 사이에 회자되는 ‘촉석루중삼장사(矗石樓中三壯士)’라는 유명한 시다.
‘촉석루에 오른 세 사나이(矗石樓中三壯士)/ 한잔 술 마시고 웃으며 남강물 두고 맹세하네(一杯笑指長江水)/ 남강물은 넘실대며 세차게 흐르누나(長江之水流滔滔)/ 저 물결 마르지 않듯 우리 혼도 죽지 않으리(波不渴兮魂不死).’
학봉은 이 시를 쓰고 난 후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진주대첩을 이끌었다. 그리고 얼마 있다 진주공관에서 과로로 죽는다. 평소 학봉을 미워하던 서인들도 그 죽음을 애석해했다고 전해진다.
학봉의 성품이 강직하고 의리가 있었다는 것은 임진왜란 때 전라도 의병장 제봉 고경명 장군(霽峰 高敬命, 1533∼1592년)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광주에서 살던 제봉은 아들 종후(從厚) 인후(仁厚)와 함께 전쟁터로 나가면서 셋째 아들인 용후(用厚, 당시 16세)만큼은 나이도 어린 데다 대를 잇기 위해서 안동의 학봉 집안으로 피란하라고 당부한다. 학봉집은 의리가 있는 집이니까 네가 가면 틀림없이 돌보아줄 것이라며. 이때 고용후는 안동에 혼자 간 것이 아니라 아녀자를 포함한 가솔 50여 명과 함께 피신을 갔다고 한다.
학봉 가족도 이때 임하(臨河)의 납실(猿谷)이라는 곳에 피란하고 있는 중이라 산나물로 죽을 끓여 연명하면서도, 학봉의 장남 애경당(愛景堂) 김집(金潗)은 이들과 같이 동고동락하였다. 고용후는 이곳에 머물면서 아버지와 형들을 포함한 칠백의사가 모두 금산(錦山)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했으며, 학봉부인과 김집은 상주가 된 고용후가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르도록 도와주고 정성껏 보살펴주었다. 고용후는 50여 명에 달하는 식솔들과 함께 학봉집에서 3∼4년쯤 머물다가 전라도로 되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고용후는 학봉집에 머물 당시 학봉의 손자인 김시권(金是權)과 같이 상을 당한 처지고, 거의 동년배라서 서로 격려하며 함께 공부하였는데, 이 둘은 1605년 서울의 과거 시험장에서 반갑게 해후하였으며 고용후는 생원과에 장원으로, 김시권도 동방(同榜)으로 진사급제를 하였다. 그 후 10년이 지난 1617년 안동부사로 부임하게 된 고용후는 파발마를 보내 학봉 선생 노부인과 장자 김집을 안동관아로 초대하여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잔칫날 고용후는 “소생에게 오늘의 영광이 있는 것은 후덕하신 태부인(太夫人)과 애경당(愛景堂)의 20년 전 은혜 덕택입니다. 두 분의 은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겠습니까?” 하고 울면서 큰절을 올렸다. 비슷한 연배인 고용후와 김시추, 김시권 형제는 그 후로도 친형제처럼 서로 돕고 의지하며 지냈다. 영·호남 간의 이념적 동지들 사이에 피어난 아름다운 이야기다.
내앞 집안의 독립투사들
의성김씨는 조선시대 대·소과 합격자가 무려 100여 명에 달하고 문집을 남긴 인물이 9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문명(文名)이 높은 집안이다. 그러나 이들의 벼슬은 그리 높지 않았다. 청계가 후손들에게 ‘벼슬은 정2품 이상 하지 말고 재산은 300석 이상 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기 때문이다.
높은 벼슬에 집착하기보다는 향리의 서당과 서원에서 글을 읽으며 자족하는 처사(處士)의 삶을 보낸 사람도 많다. 벼슬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면세계를 다지는 내공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의리정신은 구한말 의병운동과 만주 독립운동에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내앞 사람들의 의병과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별도의 책 한 권이 나올 정도로 방대하다. 청계공 탄생 500주년(2001년 2월)을 기념하는 학술논문집에 수록된 조동걸 교수의 논문 ‘안동(安東) 천전문중(川前門中)의 독립운동’이란 내용 중에 인상적인 부분을 발췌하면 이렇다.
내앞에 살던 66세의 백하(白河) 김대락(金大洛, 1845∼1914년)은 경술국치(1910년)로 조국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자 엄동설한인 12월24일 만주 서간도로 망명한다. 이 노선비는 서간도에 갈 때 혼자 간 것이 아니라 만삭 임신부인 손부와 손녀를 데리고 간다. 일본 식민지에서 증손자들이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일본신민이 되는데 이를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하일기’에 따르면 목적지 유하현으로 가는 도중인 1911년 2월2일과 23일에 손부와 손녀가 해산을 한다. 엄동설한의 눈밭에서 난산을 했다고 전해진다. 병원도 약도 구할 수 없어 버선과 신발이 얼어붙을 정도로 동분서주하고, 마을 성황당과 칠성님께 비느라 손발이 얼어터지는 참담한 상황을 겪어야만 했다. 김대락은 증손자의 이름을 중국(唐)에서 태어나 통쾌하다는 뜻으로 쾌당(快唐), 외증손자는 고구려의 건국시조 고주몽(高朱蒙)의 고장에서 태어났다는 뜻으로 기몽(麒蒙)이라고 지었다고 하니,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기가 막힌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문중 원로가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더구나 만삭인 손부와 손녀가 뒤를 따르는 걸 보고 감명을 받은 내앞 사람 22가구 50여 명이 대거 만주로 건너갔다. 이런 걸 보면 양반은 그냥 양반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내앞 출신의 독립투사 중 대표적인 두 사람을 꼽는다면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과 월송(月松) 김형식(金衡植)이다. 일송은 1923년 상해에서 독립운동자 총회인 국민대표회가 열릴 때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표로 참가하여 의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이때 부의장은 안창호, 윤해였다. 독립군 단체에 문제가 발생하면 이를 수습하는 회의마다 거의 의장을 맡다시피 할 정도로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일송이 향년 60세로 1937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했을 때, 평소 일송을 존경하던 만해 한용운이 그 유해를 수습하여 성북동 심우장에서 화장을 한 후 유언대로 한강에 뿌렸다.
월송(1877∼1950년)은 김대락의 아들이다. 사람 천석, 글 천석, 밥 천석을 하던 도사택(都事宅)에서 태어나 협동학교(協東學校) 교사를 하다가 아버지와 대소가 안팎 식솔 수십 명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8년 김구와 김일성이 만나는 남북연석회의 당시 개회식에서 사회를 보았다. 노년에 금강산에서 휴양중(1950년 가을) 전화가 미치자 미군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보다는 깨끗하게 생을 마치겠다며 구룡폭포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향년 74세. 자진하면서 남긴 절명시는 이렇다.
‘이 산에 응당 신선이 있을 터인데, 육안으로는 분간이 어렵구나. 백발 노인이 구름 사이로 치솟으니, 사람들은 나를 신선이라 하겠구나(此山應有仙 肉眼不分看 白髮聳雲間 人謂我神仙).’
내앞 사람들의 민족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중심에는 협동학교가 있었다. 협동학교는 내앞에서 수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한 산실이었다.
인물을 낳은 방 ‘산실(産室)’
풍수 좌향으로 계좌(癸坐)를 놓은 의성김씨 종택의 구조에서 필자의 흥미를 끄는 부분이 하나 있다. ‘산실(産室)’이라고 불리는 조그만 방이다. 사랑채에서 안채가 거의 겹쳐지는 지점에 있는 방이다.
풍수를 연구하니만큼 나는 유달리 이 방에 관심이 간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는 풍수의 대명제를 직접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성스러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 집의 임신부는 아이를 출산할 때 다른 방에서 낳지 않고 대부분 이 방에서 낳았다. 아이를 출산하는 방이라고 해서 산실 또는 태실(胎室)이라고도 한다.
이 방은 집 전체에서 지기(地氣)가 가장 강한 곳이기 때문에, 여기서 산모가 아이를 임신하거나 출산하면 그 정기를 받아 비범한 인물이 나온다고 의성김씨들은 믿었다. 학봉도 이 방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서 다른 아들들도 모두 여기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오룡지가의 오룡을 낳은 방도 바로 이 방이고, 그 이후로도 수백년 동안 많은 인물이 이 방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셈이다.
이 집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소설가 이문열이 94년에 발표한 작품 중에 ‘홍길동을 찾아서’라는 단편이 있다. 안동의 어느 명문가 산실(産室)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혼례를 치른 딸이 친정집의 산실에서 첫날밤을 치르고, 출산할 때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친정집의 산실에서 아기를 낳는 과정을 묘사한 내용이다. ‘입 구(口)자 두 개가 겹치는 곳에 있는 그 산실은 집 전체의 지기가 뭉쳐 있는 곳이고 풍수적으로는 종가의 기운이 몰려 있을 뿐만 아니라 그곳 문중의 기운이 몰려 있는 곳’이라는 묘사가 작품에 등장한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필자가 의성김씨 종택을 답사하는 과정에 ‘홍길동을 찾아서’는 의성김씨 종택이 그 모델이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이문열씨 진외가, 그러니까 이문열씨의 할머니가 내앞 의성김씨였고, 서울농대에 있다가 6·25 때 납북된 그의 아버지도 할머니의 친정인 이 집에서 출산하였다고 한다. 이문열씨가 대학을 중퇴하고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닐 때도 가끔 진외가인 내앞 종택에 들러 사랑채에서 몇 달씩 머물기도 하였다는 게 안동 KBS에 근무하는 김시묘씨의 이야기다.
산실의 영험함에 관한 믿음은 내앞 종택 외에도 여기 저기서 발견된다. 경주 양동마을의 손중돈 고택에서도 3명의 인물이 배출된다는 산실이 남아 있고, 안동 신세동에 있는 고성이씨의 종택, 즉 독립운동가 이상룡(李相龍, 김대락의 손윗동서)의 고택에도 조선조에 재상 3명을 산출한 영실(靈室, 산실)이야기가 전해진다.
과연 산실이라는 게 타당성이 있는가? 산실의 영험성은 풍수에서 그 집터의 입수맥을 통해 파악한다. 사찰에 가면 지맥이 들어오는 내룡, 또는 입수맥 자리에 대개 산신각이나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어 기가 충만한 종교적 영험성을 확보할 수 있듯이 산실도 마찬가지다.
그 집터의 입수맥(入首脈)은 바위를 보면 파악할 수 있다. 집 뒤에 바위가 있으면 그 바위 방향으로 집터에 지기(地氣)가 들어오고(input)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 지점이 집터의 지기가 뭉친 곳이기도 하다. 짐작건대 내앞 종택의 산실 뒤쪽에는 조그만 바위라도 땅속에 박혀 있거나 돌출되어 있었을 것이다. 현재는 바위가 안 보이지만, 혹시 돌출되어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걸 치워버렸거나 아니면 땅속에 박혀 있어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은 비범한 인물이 형성되는 조건이다. 산실에서만 낳으면 무조건 인물이 되고, 쓰레기장을 매립해서 지은 15층 아파트에서 낳으면 별볼일 없는 필부가 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첫째, 천시(天時, 타이밍)도 좋아야 한다. 천시라는 걸 넓게 해석해 보자. 만약 바둑의 이창호가 지금부터 100여 년 전에 전주에서 태어났더라면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여 죽창들고 가다가 황토현 들판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바둑으로 몇억 원씩 번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즉 어느 시대에 태어나느냐가 중요하다. 이를 좁게 해석하면 태어난 연,월,일,시도 중요하다. 그래서 사주(四柱)라는 것도 무시는 못한다.
둘째, 태어난 지역, 지리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모택동이 중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나 빨치산이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십중팔구 지리산에서 토벌대의 총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지리를 좁게 해석하면 명당이다. 쓰레기장을 매립한 아파트보다는 그래도 명당에 자리잡은 산실이 낫다는 이야기다.
셋째, 인사(人事)다. 인사를 넓게 해석하면 유전인자(DNA)다. 같은 사주팔자이고 같은 명당에서 낳았다고 할지라도 부모의 유전인자가 열등하면 별로 신통치 않은 자식이 나오는 걸 목격한다. 일단 유전인자가 좋고 볼 일이다. 좁은 의미로 보면 교육도 중요하다. 어떻게 교육을 해서 어떤 정신을 심어주느냐가 영향을 끼친다.
인물이 형성되는 과정은 이상의 세 가지 조건이 모두 부합될 때 가능한 것이지, 어느 한 가지만 가지고는 어렵다는 게 정설이다. 영남의 명문으로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내앞의 의성김씨 종택을 보면서 필자가 내려본 결론이다.
退溪학풍 이어온 항일독립운동 명문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맞아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학봉 김성일 집안의 애국정신은 그 직계 후손들과 정신적 자식인 제자들에게도 어김없이 전해진다. 학봉의 퇴계학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제자이자, 학봉의 11대 종손인 김흥락은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제자만 60명이나 배출했고 그의 직계 후손들 중에서도 무려 11명이 훈장을 받았다.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최근 미국의 어느 동양학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홍콩, 대만, 싱가포르를 포함한 아시아의 유교문화권 국가들 중에서 유교문화적 요소를 아직까지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라고 한다. 한국 다음으로 일본이고 그 뒤를 중국이 따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유교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어디인가? 충청이나 호남보다는 상대적으로 영남지방을 꼽을 수 있고, 더 범위를 좁히자면 안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동 일대에 밀집되어 있는 수많은 고택과 종택들의 존재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안동 일대에 이처럼 유교문화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이퇴계 선생의 영향이 크다. 주자성리학을 한국에 토착화시킨 인물로 볼 수 있는 퇴계는 오늘날까지도 영남과 안동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마음속의 어른으로 자리잡고 있다.
퇴계의 양대 제자로는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이 꼽힌다. 안동 일대의 명문가는 퇴계에 그 연원(淵源)을 두고 있지만, 퇴계 다음으로는 거의가 서애·학봉과 직·간접으로 관련돼 있을 만큼 두 사람의 영향력이 크다.
양대 제자는 개성도 달랐다고 전해진다. 서애가 복잡한 현실문제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데 주력한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측면이 강했다면, 학봉은 원칙과 자존심을 지키는 의리가(義理家)로서의 측면이 강했다고 한다. 유학이 추구하는 양대 날개가 바로 경세와 의리인데, 서애와 학봉이 각각 이를 담당했던 셈이다.
또 학봉집안과 서애집안은 오늘날 남아 있는 고택으로도 유명하다. 학봉집안의 고택으로는 학봉의 아버지인 청계공이 살았던 내앞(川前)의 대종택과 학봉 자신이 살았던 학봉종택이 유명하다. 한집안에 명성을 떨치는 종택이 두 채나 있는 셈이다.
서애집안도 그렇다. 하회마을에 가면 서애의 아버지가 살았던 양진당(養眞堂)과 서애 본인의 집이었던 충효당(忠孝堂)이 유명하다. 충효당이 있는 하회마을은 몇 년 전 영국 여왕이 다녀가면서 전국적으로 더 알려졌다.
물론 한집안에 종택이 여러 개가 있는 예는 이외에도 많이 있다. 집안의 중시조에 해당하는 인물이 살았던 대종택이 있고, 여기서 다시 갈라져 나간 파종택(派宗宅, 소종택)이 여러 개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대종택과 파종택 모두가 세간에 회자되는 경우는 드문 편인데, 학봉과 서애집안은 대종택과 파종택이 동등한 비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안동 금계마을에 자리잡은 파종택인 학봉종택은 역사적으로나 풍수적으로나 그리고 종택이 지닌 품격으로나 안동을 대표하는 고택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죽은 선비다. 임금 앞에서도 할말은 하고야 마는 강직함과, 임란전 일본에 통신사로 갔을 때 일본인들에게 보여준 조선 선비의 자존심과 격조 있는 태도는 오늘날까지도 영남과 안동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중앙선 철로가 바뀐 사연
학봉에 대한 영남 선비들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사건이 하나 있다. 중앙선 철도 노선을 우회하게 만든 사건이 그것이다. 중앙선은 서울 청량리에서 경북 안동까지 이어지는 철도 노선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중앙선 노선을 처음 설계할 때, 철로가 학봉의 묘소가 있는 안동시 와룡면 이하동 가수천을 관통하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설계대로라면 학봉 묘소의 내룡(來龍)이 끊어지게 된다. 풍수적인 가치관에서 볼 때 이는 학봉에 대한 엄청난 불경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이런 계획을 알게 된 학봉의 제자들과 후손을 포함한 영남 유림 수백 명이 들고 일어나 조선총독부에 진정서를 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설계를 맡았던 일본인 책임자 ‘아라키(荒木)’도 학봉이 영남에서 존경받는 큰선비임을 알고 기꺼이 철도 노선을 수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학봉 묘소를 관통하지 않고 우회하도록 설계변경을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원래 계획에 없던 터널 5개를 새로 뚫어야 했다. 청량리에서 안동까지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유난히 터널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학봉의 명성 때문이다.
아무튼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를 만들던 1970년대도 아니고,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중앙선의 철도 노선을 바꿨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학봉 집안이 지닌 권위와 사회적 영향력은 일제도 쉽게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또 학봉은 호남지역 선비들과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었는데, 이는 호남과 인연이 별로 없었던 다른 영남출신 선비들의 행적과 비교해볼 때 매우 이채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먼저 광주 무등산의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1533∼1592년) 집안과의 인연을 꼽을 수 있다. 신동아 2000년 3월호 ‘내앞종택’에서 잠시 소개한 바 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0세 노인 고경명은 아들 셋 가운데 두 아들을 전쟁터로 데려가서 삼부자(三父子)가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고, 셋째아들인 용후(用厚, 당시 16세)만큼은 안동의 학봉집안으로 보내 대를 잇도록 했던 것이다. 그만큼 고경명과 학봉은 인간적인 신뢰가 깊었던 모양이다.
이때 고경명의 셋째아들을 비롯한 고씨 가족 50여 명을 받아들여 수년간 보살펴준 사람이 학봉의 부인과 아들들이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절박한 시기에 학봉의 가족들과 제봉의 가족들은 동고동락한 것이다.
학봉은 또 3년간 전라도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냄으로써 전라도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학봉이 고을을 맡아 다스리기는 나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그가 나주목사로 재직하던 1584년에 이 지역 선비들과 합심하여 나주 금성산의 대곡동에 대곡서원(大谷書院, 나중에 景賢書院으로 개명)을 세웠다. 대곡서원은 나주에 세워진 최초의 서원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그전까지 나주에는 서원이 없었다. 나주를 비롯한 호남지역에는 서원보다는 누정(樓亭)을 중심으로 한 선비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 일대에 분포해 있는 수백여 개 누정이 말해 주는 것처럼 호남에서는 서원보다 누정이 발달해 있었던 반면, 영남지역에는 서원이 발달해 있었다.
영남학풍의 교두보 대곡서원
서원과 누정의 차이는 무엇인가. 서원에서 토론했던 주제가 주로 철학이었다고 한다면 누정의 주제는 문학이라고 보면 된다. 이는 두 지역의 환경과도 연관이 있을 성싶다. 산이 많아 농토가 적은 경상도 지역에서는 아무래도 사색의 학문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농토가 많고 물산(物産)이 풍부한 전라도 지역에서는 풍요로움과 함수관계가 있는 문학이 발달했을 것이다.
아무튼 학봉이 대곡서원을 세움으로써 영남의 철학, 즉 퇴계의 철학이 전라도로 들어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호남의 가사문학과 영남의 퇴계철학이 직접적으로 만나는 장이 바로 대곡서원이었다.
대곡서원에 처음 배향(配享)된 5명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었다. 이들은 모두 영남학파의 거유들로 이른바 ‘동방오현’으로 꼽힌다. 그 얼마후 유일하게 호남출신인 기대승이 추가로 배향되었고, 또 그 100여 년 후인 1693년에는 학봉 자신이 배향 인물에 추가됨으로써 대곡서원은 영남학파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렇게 경상도 출신인 학봉이 객지인 전라도에서 영남학풍의 근거지인 대곡서원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나주나씨 집안 사람들의 협력 덕분이었다. 나씨들이 나주의 밑바닥 인심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무리 없이 서원이 설립·운영될 수 있었던 것. 오늘날에도 학봉집안과 나주나씨 집안의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16세기 후반 대곡서원 설립 당시에는 대단히 보기 좋은 인연을 맺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퇴계학통의 正脈
학봉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퇴계학통의 정맥(正脈)을 학봉집안에서 두 번이나 받았다는 사실이다. 학봉이 한 번 받았고, 그 다음으로 학봉의 후손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년)이 다시 이어받았다. 퇴계학통을 한집안에서 두 번이나 받았다는 사실은 영남사회에서 대단한 영광으로 받아들여진다.
동양의 정신사에서 정맥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동양의 유·불·선 삼교에서는 공통적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전법(傳法)을 매우 중요시한다. 법을 전한다는 것은 생명을 전하는 것이요, 죽음을 극복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스승은 법을 전할 만한 제자를 만나지 못하면 그 생명이 끊어지는 것이므로, 자기의 법을 전할 만한 제자를 찾기 위해 고심한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전수할 수 없다. 비기자 부전(非器者 不傳; 그릇이 아닌 사람에게는 전하지 않는다)이라고 해서, 만약에 그릇이 아닌 사람에게 법을 전할 경우 여러가지 사회적 부작용을 초래하기 때문에 결국 하늘로부터 견책을 받는다고 되어 있다. 제자도 스승을 찾아 헤매지만 사실 깊이 들어가보면 스승이 제자를 찾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이 훨씬 더 크다. 스승은 제자를 알아볼 수 있지만, 제자는 스승을 알아볼 수 없다.
여기서 전법제자, 즉 정맥을 받은 적전제자(嫡傳弟子)가 지니는 의미가 있다. 동양의 종교와 학문은 문자나 책을 통해 전달되는 부분 외에도 스승과 제자간의 내밀한 구전심수(口傳心授; 말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침)를 통하여 전달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구전심수는 오직 적전제자에게만 전해지므로 그 내용은 적전제자가 아니면 알지 못한다.
불가에서는 적전제자에게 전법의 징표로 스승이 사용하던 의발(衣鉢)을 전수하였고, 도가에서는 문파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는 보검(寶劍)을 전해주었다. 유가에서는 스승이 보던 책이나 서첩을 전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러한 물질적인 징표보다 심법(心法)을 전수받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런 의미에서 퇴계학통의 정맥을 학봉 집안에서 두 번이나 받았다는 것은 퇴계의 정신이 학봉집안에 살아 있다는 말과도 같다.
퇴계의 학통이 전수된 과정을 살펴보면 대강 이렇다. 퇴계는 학봉의 나이 29세 때인 1566년에 요·순·우·탕·문왕·무왕·주공·공자·주자에 이르는 심학(心學)의 요체를 정리한 ‘병명(屛銘)’을 손수 써 학봉에게 주었다. 그래서 ‘병명’은 퇴계가 학봉에게 전해준 일종의 의발로 간주된다.
퇴계의 정맥은 학봉에게서 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裁)-이상정(李象靖)-남한조(南漢朝)-유치명(柳致明)으로 전해지고, 유치명으로부터 다시 학봉의 11대 종손인 서산 김흥락에게로 전해진다.
김흥락이 퇴계학통의 정맥을 받았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는 집안의 영광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책임이 훨씬 무거운 자리이기도 했다. 퇴계의 적전제자이자 동시에 학봉집안의 종손이라는 영광 뒤에는 그에 필적하는 사회적 책임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권위와 책임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책임 없는 권위는 성립될 수 없다.
왜경에게 무릎꿇린 치욕
1800년대 후반 김흥락이 안동 일대에서 지녔던 권위는 대단했다. 그 상징적인 예를 보자. 1890년 안동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신임 부사가 아전들과 짜고 읍민들을 착취하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 해결방안으로 등장한 것이 김흥락의 중재였다. 김흥락은 유림사회와 민중들 모두가 신뢰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김흥락이 향청에 좌정하여 “무릇 민정은 순하면 따르고 역하면 뿌리치는 법이다. 모든 폐정을 고치게 할 터이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기다리라”고 한마디 하니, 운집해 있던 읍민들이 “그 나으리께서 우리를 속이겠는가? 그만 집으로 가세나!”하고 모두 해산했다고 한다.
김흥락이 지닌 이러한 권위는 구한말 일제가 들어오면서 참담한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 굴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지사들은 의병운동과 항일운동에 나섰다. 인구비율로 볼 때 전국에서 항일지사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1896년 7월22일 학봉집안과 김흥락이 겪었던 굴욕의 한 대목은 이렇다.
“김회락 의병포대장이 지휘하는 100여 명의 의병이 안동시 북후면 옹천에서 일본군에 패전하였다. 김회락 대장은 간신히 도망하여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었던 학봉종택 안방 다락에 숨었으나 발각되어 결박되었다. 이에 화가 난 왜경은 김흥락과 김흥락의 동생 김승락, 김진의, 김홍락, 김익모 등 평소에 의병활동을 했던 집안어른 10명을 포박하여 종가 큰마당에 꿇어앉히고, 살림을 전부 마당에 꺼내어 금비녀 등 쓸만한 물건은 전부 가져가고 큰살림은 못쓰게 부수는 등 종가 집안을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한참 동안 분탕질을 한 후 다른 분은 풀어놓고 김회락 대장과 같이 활동한 김진의 두 분을 안동경찰서(안동관찰부兵隊)로 압송하였다. 김진의는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김회락 대장은 왜경의 총살 위협에도 조금도 기세가 꺾이지 않고, ‘내가 죽거든 자식들에게 보수(報:원수를 갚다)를 가르쳐라!’고 지켜보던 가족들에게 소리치며 당당하게 총격을 받고 숨을 거두어 의병대장의 처절한 일생을 마감하였다.”(‘西山 金興洛의 독립운동과 그 餘脈’)
의병대장 김회락은 김흥락과 사촌간이다. 왜병을 피해 사촌형님집이자 종가인 학봉종택에 은신해 있다가 벌어진 일이다. 안동의 어른이던 김흥락은 왜경에게 포박당해 자기집 마당에서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수모를 겪었고 사촌동생인 김회락은 총에 맞아 죽어야만 했다. 이는 개인과 집안으로 볼 때는 수모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존망을 염려했던 영남의 명문선비 집안에서 치러야만 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제, 즉 사회적 책임으로 볼 수도 있다.
안동 일대에서 절대적 권위를 지닌 김흥락이 왜경에게 포박당해 마당에서 무릎을 꿇어야만 했던 사건은 안동의 유림들과 학봉집안을 포함한 의성김씨들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았다.
그 치욕은 안동유림들과 학봉 후손들을 독립운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흥락의 제자들 명단을 기록해 놓은 ‘보인계첩((輔仁帖)’이라는 문건을 보면, 서산의 제자는 모두 707명이다. 이 가운데 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사람만 해도 60명에 이른다. 훈장을 받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제자들이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산의 제자 가운데 유명한 독립운동가로 석주 이상룡(상해 임시정부 국무령), 일송 김동삼(국민대표회의 의장), 기암 이중업(파리장서 주도), 성재 권상익(유림단 독립청원서 사건), 공산 송준필(파리장서 주도), 대개 이승희(만주 독립군), 백하 김대락(만주 독립군), 소창 김원식(만주 정의부)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안동일대에 거주하는 의성김씨들 중에서 훈장을 받은 사람은 27명인데, 이중 학봉의 후손이 11명이나 된다. 학봉집안은 독립운동가의 집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로 보면 안동이 양반동네라는 말을 듣는 것은 그에 합당하는 사회적 책임, 즉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치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파락호로 위장해
김흥락이 종가 마당에서 포박당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 이를 현장에서 지켜본 손자가 있었다. 당시 나이 10세였던 김용환(金龍煥, 1887∼1946년)이다. 학봉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은 70세의 조부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21세 때에 이강계(李康秊) 의병진(義兵陳)에 참여하여 전투를 하는 등 일생을 항일운동에 바치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것이다.
김용환의 항일운동 방법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그는 학봉종택에 대대로 내려오던 전재산인 전답 700두락 18만평(현재 시가로 180억원)을 모두 독립군자금으로 보냈다. 그러다보니 말년에는 종가 살림이 거의 거덜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안동 일대에서 유명한 노름꾼이자 파락호로 소문이 났었다. 명문가 종손이 되어 가지고 집안 살림을 망해먹은 대표적인 사례로 ‘학봉 종손 김용환’의 이름 석자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러나 이는 김용환의 철저한 위장했다. 일제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하였던 것인데, 얼마나 완벽했던지 집안 사람들 사이에서도 종손이 진짜 노름꾼인 줄 알고 원망이 자자했다. 오죽했으면 ‘양반동네 소동기’라는 책의 저자인 윤학준이 근대 한국의 3대 파락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衡平社) 운동의 투사였던 김남수(金南洙), 그리고 학봉 종손인 김용환을 꼽았을까.
1945년 광복이 되고 나서야 만주 독립군에 군자금을 보냈던 그의 비밀스런 행적이 여러 자료에 의하여 드러났다. 그는 1946년 임종에 이르러서도 끝내 그 비밀을 밝히기를 거부하고 죽었지만, 근래에 독립운동을 했던 자료와 증거들이 발견됨으로써 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용환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김후웅 여사는 1995년 아버지가 생전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받게 되자 아버지에 대한 그간의 한 많은 소회(所懷)를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제목의 서간문으로 남긴 바 있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붙어 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학봉 종손이 파락호로 위장하면서 그 많던 종가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넘기고 그것도 모자라 외동딸 시집갈 때 필요한 장롱 살 돈마저 써버려 큰어머니가 쓰던 헌 농을 가지고 시집을 갔다는 이야기는 읽은 이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그러나 그 돈이 노름해서 탕진한 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고보니 평생 아버지를 원망하던 딸의 입장에서 감회가 어떠하겠는가. 너무나 드라마틱한 반전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끝내 발설하지 않았던 김용환의 그 결의와 각오가 놀라울 뿐이다.
짐작하건대 그 결심은 그가 10세 때 하늘같이 여겼던 조부가 왜경에게 수모를 당하던 광경을 목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千年不敗之地의 땅 검재
이제 학봉고택의 지세가 어떤지 살펴보기로 하자. 대구에서 안동으로 가다보면 서안동 인터체인지가 나오고, 거기서 안동 시내쪽으로 들어가다가 왼편의 봉정사 쪽으로 방향을 틀면 금계(金溪)마을이 나온다. 금계의 순수 우리말 표현은 ‘검재’다. 학봉종택은 이 검재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16세기의 기록인 ‘영가지(永嘉誌)’를 보면 검재는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 1000년 동안 패하지 않고 번성하는 땅)’로 소개되어 있다. 풍수가에서 ‘삼원불패지지(三元不敗之地; 180년 동안 패하지 않는 땅)’라는 표현은 가끔 쓰지만, 천년불패지지라는 표현은 거의 쓰지 않을 만큼 엄청난 말이다.
그러니 학봉종택이 천년불패지지인 검재마을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일단 주목해야 한다. 불패(不敗)란 전쟁, 기근, 전염병과 같은 삼재(三災; 3가지 재난)가 별로 없다는 말과도 같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살기 좋은 동네다. 검재의 풍수가 어떠하길래 고인들은 이처럼 찬탄을 금치 못했을까.
검재 지역 산세의 특징은 한마디로 부드러움이다. 동양의 현자들은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을, 동(動)보다는 정(靜)을 중시했다. 부드러움과 정이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늘상 사는 사람들이야 으레 그러려니 하겠지만, 외부인이 처음 검재마을에 들어서면 100m 내외의 야트막한 동산들이 주조를 이루는 산세에서 편안함과 부드러움을 인상적으로 느낄 수 있다.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인 학가산(鶴駕山), 천등산(天燈山), 조골산(鳥骨山)의 줄기들이 내려와 기세가 순해지면서 상산(商山), 주봉산(住鳳山)을 형성하고 다시 이 산세가 들판쪽으로 내려오면서 더욱 순해져서 야트막한 동산들을 형성해 놓은 것이다.
나는 이곳 검재의 산세를 보면서 몇 년 전 답사한 중국의 장시성(江西省) 산세를 연상했다. 장시성은 중국 풍수의 양대 파벌인 형기파(形氣派)와 이기파(理氣派) 가운데 형기파의 본향이다. 사람의 관상(觀相)을 보듯이 산의 관상을 중시하는 입장이 형기파라면, 산의 사주(四柱)를 중시하는 입장이 이기파다.
형기파가 산의 관상을 볼 때 포인트로 삼는 부분은 전체적인 형태다. 즉 산세가 원만하고 부드러운가를 먼저 본다는 말이다. 산이 높지 않고 둥글둥글하고 바위산이 없을 때 부드럽다고 한다. 필자는 당시 장시성의 산세 대부분이 바위 절벽이 없이 둥글둥글한 금체(金體) 형세를 하고 있음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과연 형기파가 태동할 만한 산세구나! 하고 말이다.
안동의 검재 산세가 이와 흡사하다. 오히려 장시성 산세보다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장시성보다 산들이 더 낮고 완만해서 산을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는 만족감과 안도감을 준다. 살기(殺氣)도 보이지 않는다. 살기가 없는 땅에서는 살생도 다른 곳에 비해 훨씬 적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검재는 문사(文士)가 살기에는 최적의 산세가 아닌가 싶다. 문사는 거친 부분을 다듬어 부드러움으로 바꾸어주는 사람이다. 거침에서 부드러움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바로 문명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거친 사람이 다듬어져서 부드러워질 때 그 강함은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선비는 외유내강을 전범으로 삼은 것 아닌가.
그러니 검재는 외유내강의 문사를 길러내는 데 있어서 최적의 산세를 갖추었다고 하겠다. 평소에는 지극히 예(禮)를 중시하는 선비면서도, 굴욕에는 참지 못하고 독립운동으로 나갔던 검재사람들의 기질은 이런 산세와 무관하지 않다.
검재 산세의 장점 중 다른 하나는 물이 완만하게 흐른다는 점이다. 냇물의 물살이 급하게 흐르면 우선 물속의 산소 함유량이 적어서 생태학적으로 좋지 않고, 급류가 흐르면서 그 물살을 따라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때문에 기운이 모이지 않고 흩어진다. 그래서 한일(一)자나 직선으로 흐르는 물길보다는 에스자나 갈지자로 흐르는 물을 풍수가에서 선호하는 것이다. 검재를 흐르는 개천들의 물길은 에스자 형태로 완만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검재의 지형이 경사가 적은 평지고 개천이 동네마다 흘러 수량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안동대 이효걸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검재의 냇물이 느리게 흐르기 때문에 가뭄 피해를 비교적 덜 받으므로 검재마을에는 저수지가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낙동강 본류와 개활지(開豁地; 앞이 탁 트인 너른 땅)를 끼고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배수가 잘되어 다른 지역에 비해 수해의 피해도 크지 않다고 한다. 필요한 양의 물을 주산인 주봉산과 상산에서 일정하게 공급받으면서, 물을 빨리 지나가게 하지도 않고 머무르게 하지도 않는 것이 검재마을의 수세(水勢)라는 것이다. 농경사회에서는 농사가 중요하고 농사에서는 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이 적당한 동네인 검재는 농사짓기에도 좋은 조건을 갖춘 셈이다.
조선후기의 상류층 주택
학봉종택은 조선후기 상류주택의 모습이다.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풍뢰헌(風雷軒), 선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운장각(雲章閣)을 모두 합쳐 90여 칸, 2000평 대지의 규모다.
운장각에는 총 1만5000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 503점은 문화재로 지정됐다. 민간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화재 규모로는 국내 최대다. 여기서 필자의 주의를 끈 유물은 학봉이 사용하던 안경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안경이라고 하는데, 학봉이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갔을 때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 안경테는 거북껍질(龜甲)로 되어 있다.
현재 건물의 좌향은 서남향의 간좌(艮坐)다. 영남지역의 명문부가(名門富家)에선 흥미롭게도 간좌 집이 많이 발견된다. 학봉 생존 당시에는 간좌인 이 터에 집을 지었으나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되고 습기가 많아서 1762년에 지금 위치에서 100m 가량 떨어진 소계서당(邵溪書堂) 자리에 해좌(亥坐)의 종택을 지어 1960년대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4년에 원래의 간좌 자리로 다시 건물을 뜯어 이사온 것이다. 습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집 터를 2m 정도 흙으로 돋운 다음에 이사를 왔다고 한다.
집 뒤의 내룡은 산이 아니라 작은 동산에 가까울 정도로 아담하고 부드럽다. 태조산인 천등산에서 20리를 굽이쳐 내려온 맥이라고 한다. 또 집앞의 안산도 둥글둥글한 금체 형태의 작은 동산들로 형성되어 있다. 이 봉우리들은 노적봉으로서 쌀과 재산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소계서당이 있는 해좌의 구종택과 간좌의 현종택은 풍수상에서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해좌 터는 멀리 조산에 뚜렷한 모습의 문필봉이 좋게 보인다. 문필봉은 학자가 살기 좋은 집터다. 반면에 수구가 벌어져 있고 물이 집터를 감아 돌지 않고 쭉 뻗어나가는 형세다. 즉 해좌 터는 문필봉이 장점인 반면 수구와 물의 흐름이 약점이다. 현재 종택인 간좌는 문필봉이 없는 대신 물의 흐름이 집을 감싸고 흘러서 좋고, 안대도 노적봉이라 재물이 모이는 터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각기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는 것이다. 어느 터를 택할 것인가는 종택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학봉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대에 이르러 독립운동 군자금을 대느라고 이 집 재산은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다. 그런데다 딸만 하나 있었지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했다. 돈도 떨어진 데다 아들도 없다는 것은 수백년간 명맥을 이어온 학봉종가 역사에서 일대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학봉종가를 보종(保宗)할 것인가? 먼저 대를 잇기 위해서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시급했다. 학봉집안은 워낙 손이 귀해서 김용환도 양자로 들어온 종손이다. 전체 문중회의를 소집하여 논의한 결과 검재에서 100리 정도 떨어진 지례(知禮)라는 곳에 살고 있는 김시인(金時寅)이 종손으로서의 여러 자질을 갖추었다고 판단하고 그를 양자로 삼기로 결정했다. 물론 양자 결정에는 종손인 김용환의 생각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문제는 김시인의 생가에서 아들을 양자로 보내는 일을 반대하는 것이다. 살림도 완전히 거덜난 상태에서 종손의 무거운 책임을 다한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생가쪽에서는 완강하게 양자를 거절했던 것이다.
양자로 종손 잇기 작전
이를 설득하기 위해서 전체 문중사람들이 100리나 떨어진 지례의 생가에 가서 간청하였다. 아예 생가 인근마을에 집을 한 채 얻어 10명씩 조를 짜 생가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득과 간청을 반복했다. 마치 사극에서 나오는 석고대죄(席藁待罪)를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그 기간이 자그마치 7개월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끈질긴 설득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문중사람들은 보종을 위해서는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로 여겼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들어온 종손이 14대 김시인이다. 대개 양자로 들이는 나이는 10세 전후 또는 총각 때가 상례인데 김시인의 경우는 29세의 적잖은 나이에 양자가 됐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김시인은 이미 결혼해서 아들을 2명이나 둔 상태였다. 이처럼 처자식까지 데리고 온 양자를 일컬어 안동지역에서는 ‘둥지리’ 양자라고 부른다. 둥지를 통째로 옮겨왔다는 뜻이다.
현 종손인 김시인의 나이가 올해 85세고 그가 학봉종택에 양자로 들어온 해는 1946년이다. 이때 양자로 와보니까 집에는 숟가락 하나 변변한 것이 없을 정도로 살림이 궁색했다고 한다.
그렇게 퇴색한 종가를 오늘날과 같이 사람들이 모여드는 문중의 중심지로 다시 일으켜 세운 주인공이 바로 김시인이다. 80대 중반의 고령인데도 꼿꼿한 기세를 지니고 있다. 쏘아보는 듯한 안광이 상대를 압도하는 압인지상(壓人之像)의 기풍을 지닌 인물이다.
종가를 다시 일으키는 과정에서 빼놓을수 없는 인물이 14대 종부인 조필남(趙畢男) 할머니다. 타협을 모르는 칼 같은 남인(南人)이라고 해서 ‘검남(劍南)’으로 알려진 영양 주실마을의 한양조씨 집안이 친정이다. 명문가의 딸로서 가사 외우기를 즐겨하고 문장력이 뛰어나 모모한 집안에 보내는 사돈지를 써달라는 부탁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국량이 크고 성품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지혜가 뛰어난 종부의 전형이다.
14대 종부는 종가살림이 어려웠어도 찾아오는 문중 사람들 누구에게나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려고 애썼다. 찾아온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다. 줄 게 없으면 하다못해 호박 한 덩어리라도 손에 쥐어 보내곤 했다. 종부를 접해본 지손(支孫)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종부의 따듯한 인간미에 감동해서 종가를 보존하는 보종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조씨 할머니가 작고한 지난 1993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날 대구 시내의 꽃가게에 꽃이 모두 동났다. 인구 300만 명이 사는 대도시에서 꽃가게가 한두 군데도 아닐 테고, 더군다나 그때가 특별한 기념일도 아닌데 꽃이 다 팔린 것이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대구 지역신문의 기자가 그 원인을 조사했다. 그 결과 안동의 어느 댁 종부의 부음 때문이라는 얘기를 듣고 더 깊이 추적해 보니 학봉종가댁이라는 게 밝혀졌다. 조씨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가까운 안동은 물론이고 멀리 대구의 꽃가게까지 그 영향이 미쳤던 셈이다. 학봉가의 종부인 조씨 할머니의 덕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으로 깊은 인상을 받은 대구 매일신문 기자는 신문에 ‘종부(宗婦) 시리즈’를 기획 연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종가 하면 으레 남자들인 종손에게만 초점을 두었는데, 그 배후에서 묵묵히 종가를 지탱하는 종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존중받는 종부의 권위
실제로 학봉종가에서 종부의 권위는 존중받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매년 정월 초하룻날 종가 사당에 설차례를 지낸 후 이루어지는 신년 세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배는 종가 안채의 마루에서 이루어진다. 학봉의 후손들 가운데 나이든 연장자 100여 명이 종가에 찾아와 종부에게 세배를 드린다. 대개 60, 70대의 갓 쓴 노인들이, 그중에는 종부보다 20년 연상인 노인들도 나이에 상관없이 정초에는 종부에게 세배를 드린다. 물론 종부도 같이 절을 하는 맞세배 형식이지만, 100여 명의 갓을 쓴 노인들이 대청마루에 줄 맞추어 앉아서 종부 한 사람만을 상대로 큰절을 하는 풍습이 학봉종택에서는 대대로 내려온다.
문중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도 종부인 조씨 할머니의 영향력도 컸다. 문중 남자들이 모여 문회(門會)를 할 때,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면 바깥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종부가 몇몇 사람을 불러내어 이런 식으로 하였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개진한다. 종부의 의견이 논의과정에 전달되면 종부의 의견대로 결정되는 수가 많았다는 것이 조씨 할머니의 3남인 김종성(金鍾聲·50)씨의 전언이다.
14대 종손 김시인과 조씨 부인은 3남3녀를 두었다. 차종손인 장남은 김종길(金鍾吉·60)씨로 삼보컴퓨터 사장, 나래이동통신 사장, 인터넷 기업인 두루넷 사장을 지냈으며, 현재 삼보컴퓨터 부회장으로 있다. 차남 김종필(金鍾弼·58)씨는 감사원 부이사관으로 근무하고 있고, 삼남인 김종성씨는 LG전자 상무로 근무하고 있다. 또 큰딸은 대구 장씨집안으로 출가했고, 둘째딸은 원주 변씨종가로 출가하여 교편생활을 하고 있고, 셋째딸은 영양남씨 집안으로 출가하였다.
종택 사랑채에서 차종손인 김종길씨를 만나보았다. 그는 TV 프로인 ‘성공시대’에 몇 달전 출연한 바 있고, 동탑산업훈장과 올해의 정보통신인상 등을 수상해 언론에 집중적으로 소개된 ‘유명한’ 인물이다. 주변의 소문에 의하면 우리나라 기업 CEO 중에서 최고의 CEO로 선정되었다고도 하는데, 그만큼 친화력과 리더십을 갖추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전통을 중시하는 학봉종가의 차종손으로서 첨단 인터넷사업을 주로 해왔는데, 전통과 첨단과의 만남에서 오는 갈등은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성공시대 프로에서 저의 캐릭터를 ‘갓을 쓴 인터넷 사업가’라고 표현하더군요. 갓과 인터넷이 만나다 보니 장·단점이 있었습니다. 장점은 직원들과 무난한 인간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는 점입니다. 저는 종손으로 성장하다보니 항상 집안의 여러 사람들과 행동을 같이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종손으로서 굉장한 우대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학봉집안이라는 공동체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을 의식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직장생활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훈련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갈등이 된 점은 인터넷이 외래문화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은 우리 전통을 확고히 알고 주체의식을 가지고서 외래문물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전혀 걸러지지 않은 서양문화를 젊은 사람들이 무조건 추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 부분에서 내면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학봉 후손들의 종손 키우기
―집안사람들 이야기로는 보종계(保宗契)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다녔다고 하는데, 보종계가 어떤 계입니까?
“제가 고려대학교에 입학할 즈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을 내기가 힘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학봉후손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종손을 대학에 가게끔 도와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계를 조직하여 십시일반으로 돈을 조금씩 걷어서 제 등록금과 학비를 대줬습니다. 대략 300∼400가구에서 돈을 거두었습니다. 그걸 ‘보종계’라고 부릅니다.
저희 집안은 보종의식이 강해서 지손들이 종가 농사도 대신 지어주고, 겨울철엔 땔감도 해다 줍니다. 명절 제사 때는 종가집 마당의 잔디도 깎아주고, 김장 때는 채소까지 그냥 갖다줍니다. 이렇게 종가에 대한 보호의식이 특별합니다. 어른들 말씀을 들어보면 일제 때 조부(13대 김용환)께서 종가를 세 번이나 다른 사람에게 팔았는데, 그때마다 지손들이 돈을 걷어 다시 구입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도 혹시 문중사람들이 종가에 잠깐 들를 때면 그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아무리 바빠도 제가 직접 커피를 탑니다. 천분의 일이라도 갚아야죠.”
―부인인 이점숙 여사는 혹시 종부 역할을 부담스러워 하지는 않습니까?
“집사람은 퇴계종가의 종녀입니다. 처녀 때부터 종가 분위기에서 자라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셈입니다. 저희 부부가 서울에 살고 있지만 한달에 보름은 안동에 내려옵니다. 손님들 오면 밥상 차리고 접대해야 합니다. 집사람은 서울에 있을 때는 사장 부인이지만, 안동에 내려오면 손님들 밥상 들고 직접 날라야 합니다. 하루 평균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이 대략 50명은 될 겁니다. 밥상을 다 못차려 드릴 때는 차라도 한 잔 대접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퇴계의 종녀인 이점숙 여사는 퇴계가 학봉에게 전해준 ‘병명’에 3년 동안 한땀 한땀 수를 놓아 12폭 병풍으로 만들어놓았다. 학봉종택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이 병풍을 사용한다고 한다.
차종손인 김종길씨는 딸만 넷이고 아들이 없다. 그래서 삼남 김종성씨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다. 장남에게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일 때는 보통 차남의 아들을 들이는 것이 관례다. 이 관례대로라면 차남인 김종필씨의 아들이 양자로 가야 하고, 김종필씨가 아들을 하나밖에 두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삼남인 김종성씨의 아들이 김종필씨의 양자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절차가 복잡해지기 때문에 두 아들을 둔 김종성씨의 장남이 곧바로 종손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종성씨의 아들이 양자로 가게 된 다른 이유도 있다. 14대 종손(김시인)이 양자로 오기 전에 장남 김종길과 차남 김종필은 이미 지례에서 출생했고 검재종택 양자로 들어온 후에 출산한 아들이 김종성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삼남은 순수 검재종택 산(産)이므로, 그 김종성의 아들이 양자로 가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문중어른들의 판단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1000명 이상 참여하는 집안 행사
5세 때 양자로 들어간 김종성의 장남은 김형호(金亨淏·21)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서울의 생부 집에서 살면서 양부(김종길)집을 왔다갔다 했지만, 대학만큼은 안동에 내려와 안동대학 국학부에 재학하고 있다. 일종의 종손수업을 위해서 서울이 아닌 안동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것이다. 종가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임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삼남 김종성씨는 집안의 역사와 문중의 대소사에 관한 일들을 빠짐없이 꿰뚫고 있었다. 무엇이든지 물어보면 척척박사다. 집안의 전통에 대한 관심이 지극하다는 증거다. 관상에서 풍기는 분위기도 진지하고 신중한 학자풍이다. 그를 인터뷰했다.
―큰아들을 양자로 보냈는데 혹시 섭섭한 마음은 없습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안의 친척들은 저를 보고 ‘대원군’이라고 농담도 합니다. 저는 검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종가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집에 찾아오는 빈객의 규모는 어느 정도나 됩니까?
“영남 일대 종가에서 저희집같이 손님을 많이 치르는 집도 드물 겁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100년 전 11대 종손인 서산선생의 장례식 때 각지에서 모여든 조문객이 400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4000명을 저희 집을 비롯해 검재의 학봉후손들 집에 분산시켜 전부 숙식을 제공했습니다. 그때 조문객이 가지고 온 대구포가 얼마나 많은지 고방(庫房)에 한가득 찼다고 합니다.
1987년 운장각 준공식 때, 그리고 1995년 서산선생과 조부(김용환)의 독립훈장 추서를 사당에 고유(告由)할 때도 손님이 1000명 정도 왔습니다. 1999년 11월 서산선생 서거 100주기 추모회와 2000년 11월 추모강연회 때도 1000여 명이 모이셨습니다. 저희 집에서 행사를 할 때는 보통 평균 1000명 이상 참석합니다.
지난 퇴계 탄신 500주년 학술회의에 참석한 외국 손님들 몇 분은 호텔에 가지 않고 저희 집에서 숙식을 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다닐 때인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사랑채엔 항상 10∼15명의 과객들이 머무르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무전취식이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대접할 수 없었죠. 1970년대에 도로가 뚫리면서 과객들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도로가 많이 생기면서 전통문화가 바뀐 것이죠.”
현재의 학봉집안 후손들의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김호면(金鎬冕·전 국영유리부회장·川上文化保存會 대표), 김원환(金元煥·초대 경찰청장), 김식현(金植鉉·전 서울대 경영대학장), 김대환(金大煥·서울고등법원장), 김명준(金明俊·장기신용카드 사장), 김시학(金時學·전 청구그룹 부회장), 김도현(金道鉉·전 문화체육부 차관), 김근환(金根煥·안동시의회 의장)씨 등이 명망인사로 꼽힌다.
또 한 가지 특기할 부분은 이 집안에서는 유난히 초·중·고 교장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점이다. 배출된 교장만 무려 30여 명에 달한다. 전통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선비집안 후손들이 진출할 수 있는 가장 원만한 직업이 학교 선생님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학봉종가는 과거 완료형의 종가가 아니라 현재에도 끊임없이 역사가 진행되는 현재진행형의 종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여전히 접빈객이 가능한 명문가로 400년 동안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명가는 인물을 낳고 인물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가 보다.
(2008 03/04 뉴스메이커 764호)
이상한 일이었다. 안동 학봉종택 안채 마당을 검정닭 한 마리가 유유자적 거닐고 있었다. 이 닭은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한쪽 발을 한껏 쳐들어 잠깐 멈추었다가, 이내 앞으로 내디뎠다. 그 모습이 어찌나 도도한지 얼핏 거들먹거리는 것처럼 비치기까지 했다. 종손의 상(喪)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터였으므로 그 닭은 용케도 제삿날을 면한 셈이었으리라. 평소 대갓집 살림으로 넘나들던 안채는 여전히 삶의 손때로 융숭 깊었다. 툇마루에는 고추가 빨갛게 말라가고 있었고, 기둥에 걸린 살림살이는 낡았으되 정갈했다. 다만 잠시 시간이 멈춘 듯 적막한 안채를 닭 한 마리가 어디서 배운 버릇인지 그렇게 도도한 걸음걸이로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지난 2월 3일 향년 91세로 타계한 학봉 김성일 선생의 14대 종손 김시인 옹의 장례는 근래에 보기 드문 7일장으로 치러졌다. 부음이 전해진 후 문중과 유림을 비롯한 숱한 문상객의 발길이 줄을 이었고, 발인이 있던 날에는 전국의 사진작가들까지 한데 몰려들었다. 고인은 마침내 금계리의 선영에 묻혔고, 40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온갖 과객으로 넘쳐나던 사랑채는 이제 여막(廬幕)으로 남았다. 깊은 애도와 탄식도 잦아든 뒤 모두 돌아간 사랑채는 외려 고즈넉하기까지 했다. 영좌가 놓인 제상 밑으로 고인의 검정고무신이 가지런한데, 향탁의 향불은 자꾸만 사위어갔다. 거기 멈춘 것은 무엇인가. 한 사람의 유한한 삶인가, 아니면 시간의 무한한 흐름인가.
(후략...)
2009.04.09.